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여러분이 오늘 성서말씀을 이해하려면 2천7백 년 전으로 생각을 돌려야합니다. 너무 긴 세월이래서 실감이 잘 가지 않겠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안에서 구체적인 인간 삶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으면 그게 가능합니다.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한 다음 남유다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앗시리아와 한판 붙기에는 유다의 국력이 형편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앗시리아의 요구를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유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유다 왕은 히스기야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종교적으로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능력이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억압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집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나름으로 깊은 생각을 했겠지요. 외교전문가, 군사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았겠지요. 이는 흡사 요즘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 미국과의 동맹에 힘을 쏟을 것인지 아니면 주변 나라의 압력에 맞장을 뜰 각오를 해야 하는지, 또는 미국,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해서 생존을 추구해야하는지, 정답을 찾기 힘든 것처럼 그 당시 히스기야 왕도 역시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지 그는 이집트와의 군사동맹을 통해서 앗시리아와 싸우려고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런 선택은 실패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유다가 이집트의 군사력에 의존하려는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사야의 비판이 히스기야의 귀에 별로 설득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왜 듣지 않았는지 여러분은 궁금하시겠지요. 이사야의 주장, 그의 예언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명백했다고 한다면 히스기야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시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많은 설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참된 예언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는 지금 우리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그 설교가 진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추수 때가 되어야, 즉 역사가 지난 다음에야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됩니다.
솔깃한 말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백성은 참으로 배반하는 백성, 믿을 수 없는 자식들, 야훼의 가르침을 따르기 싫어하는 자식들이구나.”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백성들은 야훼의 가르침을 싫어했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야훼 신앙에 철저했던 백성들이 야훼의 가르침을 싫어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하더라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10,11절에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계시를 보는 이들에게 ‘계시를 보지 말라.’ 하고, 예언자들에게 ‘진실을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라.’ 하며, ‘솔깃한 말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하여라. 한길에서 물러서거라. 한길에서 비켜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이야길랑 우리 앞에서 꺼내지도 말라.’ 하는 자들아!” 히스기야 왕을 중심으로 한 유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솔깃한 말은 무얼까요? 이집트와의 군사동맹을 통해서 앗시리아를 물리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지금 앗시리아는 사르곤 왕이 죽은 다음에 여기저기서 반앗시리아 혁명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기회에 이집트와 손잡고 명실상부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소리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동조했겠지요. 야훼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테니까 확신을 가지라는 예언도 많았겠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게 잘 된다는 목소리보다 더 솔깃한 소리는 없습니다. 유대 왕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이제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그런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민중들은 솔깃한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설교자들은 그런 말만 설교합니다. 미국에서 한창 잘 나가는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우리의 삶을 긍정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자기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젊은 목사 부부가 길을 가다가 멋진 집을 보았습니다. 그걸 갖고 싶어서 그들은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꾸준히 기도했더니 얼마 후에 그 집을 실제로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한국교회 신자들이 좋아하는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있는 삶>도 역시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삶을 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주장합니다.
저는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세계여행도 다니고, 문화생활도 하고, 자식들도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설교는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처세술이며, 상담학이며, 성공학에 불과합니다. 그런 일들은 교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단체나 종교들이 많습니다. 속칭 “남녀호랑개교”도 사람들의 행복을 채워주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솔깃해하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솔깃하기는 하겠지만 터무니없습니다. 예언자는 역사학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이사야는 이집트와의 군사동맹을 통해서 유다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발상 자체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 왕과 민중들은 그런 쪽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터무니없어도 솔깃한 말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걸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오파라 돈조바니의 주인공은 바람둥이입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지체가 낮은 여자들로부터 높은 여자들까지 많은 여자들이 이 바람둥이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그가 터무니없지만 솔깃한 말을 그럴듯하게 할 줄 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컨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습니다.”는 말을 들은 여자들은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기분에 따라서 판단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기분을 맞춰주는 말에 의해서 여자들이 쉽게 넘어갑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에 속는 거야 그저 낭만적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자기 영혼을 터무니없는 일에 소진한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소리에는 대개 달콤하고 매혹적이지만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게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해야만 행복할 것처럼 강요합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가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말합니다. 어떤 대선 후보는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시켜서 남한을 수직으로 가르는 운하를 만들겠다고 외칩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반값으로 아파트를 건축할 수 있다고 선동합니다. 화장품 회사들은 자기네 화장품을 쓰면 모든 여자들이 미인이 될 것처럼 광고합니다. 솔깃한 말이지만 그것은 터무니없습니다. 그런 광고와 선전대로 살아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그런 것들이 이루어진 다음에 여전히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이런 잘못은 마치 막 쓰러지려 하는 갈라진 성벽과 같아, 높은 성벽의 배가 불쑥 터져 창졸간에 와르르 무너짐 같으리라.”(13절) 우리 사회가 이런 상태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성벽의 배가 불쑥 터져 나온 모습 말입니다.
고요히 믿고 의지함
지금 이사야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대군을 몰고 점점 남쪽으로 밀고 내려옵니다. 이제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고 앗시리아와 한판 붙어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을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유다 왕 히스기야와 백성들을 향해서 막 쓰러지려 하는 갈라진 성벽과 같다고 책망하는 이사야는 도대체 현실을 알기는 알고 하는 말일까요? 왜 이렇게 기를 꺾는 말을 하는 걸까요? 이사야는 그 당시에 꽤나 욕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저렇게 부정적인 사람이 예언자라고 하니 예언자가 모두 죽었나 보다 하는 비아냥도 많았을 겁니다. 어쨌든지 지금 이사야는 이런 위태로운 시기에 어떤 대안을 갖고 비판하는 겁니까? 아니면 무조건적인 비판입니까?
15절에서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고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강한 화력을 가진 앗시리아가 공격하고 있는 마당에 진정하라니요, 조용히 믿고 의지하라니요, 무슨 뜻입니까? 아마 믿음이 좋은 분들은 이런 말씀에 은혜를 받을지 모르겠군요. 옳다. 전쟁이 일어나도 기도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정치와 경제, 사회에 속한 문제들에 휘둘리지 말고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다고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고, 가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고, 돌연사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릴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려는 것은 조용히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앗시리아를 물리치고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국제적인 문제를 이사야가 해결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수십, 수백 명의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그 민족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예언자들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정말 무책임한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이 이집트와 맺으려는 군사동맹을 비판하면서 자기도 어떤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않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이사야의 충고를 잘 들으십시오.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장만해야만 되겠다고 마음이 들떠 있으면 그 마음을 진정해야 합니다. 자기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야훼 하나님을 고요히 믿고 의지하십시오. 아직도 여러분은 이 살벌한 세상에서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다,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할까요?
히스기야에게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마음이 들떠서 외교정책에만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늘 누구와 군사동맹을 맺는가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지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거기서 삶의 힘을 얻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허둥대며 어떤 궁리에 빠져버립니다.
오늘은 2006년이 끝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일 년 동안 살았을까요? 솔깃하지만 터무니없는 말에 마음이 들떠 있었나요, 아니면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나요?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여기서만 참된 삶의 힘이 주어집니다. 이런 삶이 2007년에는 여러분에게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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