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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대는 사람들



수군대는 사람들

<눅19:1-10>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읽기만 해도 어떤 깨달음이 전달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분들은 이 이야기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된 걸 보면 어떤 설교를 듣게 될는지 미리 감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면 우리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하며, 더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미처 깨닫 못한 부분들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해 들어갈 때 처음으로 통과해야만 했던, 그리고 그 싸움에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여리고 성에 삭개오라는 이름의 세리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삭개오는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되자 예수님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뽕나무 밑에 와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올려다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예수님의 얼굴이나 한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심정으로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는 뜻하지 않은 이 예수님의 제의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너무 황송하게 생각했는지, 또는 감격에 겨운 탓이었는지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혹시 남에게 사기친 일이 있으면 네배로 갚겠다고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의 말이 끝나자 곧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바로 이 구절이 오늘 본문 사건의 핵심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행동했다는 사실보다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가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백부장, 마리아, 수가성 여인 등등, 이들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들의 행동이 아무리 본받을만하더라도 복음서의 주제는 역시 예수님입니다. 오늘 삭개오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점은 잊어버려도 아무 상관 없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우선 삭개오가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겠다는 약속이 있은 다음에 즉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걸 보면 삭개오의 이런 결단이 바로 구원을 불러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누가복음 18:22에서 어떤 부유한 관원에게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면 하늘의 보화가 크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명처럼 소중이 여기는 재물을 과감하게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구원을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는 이미 뽕나무에 오를 때부터 세리장이라는 위신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역시 삭개오는 무언가 자신을 포기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칭찬받을 만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회심의 열매를 맺는 그의 이런 모범적인 태도를 배워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짐합니다. 이런 성서읽기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게 아닙니다. 즉 이 본문에서 삭개오의 이런 포기와 헌신이 핵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남에게 감동을 줄만한 이야기가 흔하지는 않아도 눈씻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는 아닙다. 자기가 평생 모은 재산을 대학교나 병원에, 또는 종교단체에 희사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지난번 수재민 돕기 성금만 하더라도 일천 몇백억원이 모였다고 합니다. 예년에 비해 두 세배나 많은 액수라고 하는데, 그만큼 수해가 큰 탓인지 아니면 우리 국민의 마음씨가 훨씬 따뜻해진 탓인지 모르지만 이런 현상들은 일단 바람직 합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며, 또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 모든 10억원을 어떤 자선단체에 바쳤다고 합시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면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행위이지만, 간혹 내면적으로는 그가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저질렀던 파렴치한 행위들을 뒤늦게 보상받으려는 이해타산이 깔려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같은 미숙한 사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지만 합법을 위장한 탈세와 정경유착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기업가가 수재민이나 복지시설에 수억원을 기탁했을 경우에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봉사와 헌신이 늘 이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희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어떤 사심없이 선한 일을 하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일단 자기의 의지로 헌신적인 태도를 보일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85년전, 그러니까 1517년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당의 신부이자 신학대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신학논제를 성당문 위에 대자보 형식으로 내다걸음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가 점화되었는데, 루터가 강조한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그럴듯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며,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루터가 인간의 고결한 행동의 의미와 가치를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 자기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절대적인 세계, 즉 구원의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을 사랑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 그런 흉내만 낼뿐이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삭개오의 행동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자기 재산을 모두 처분하지 않고 왜 반만 그렇게 한다고 말했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지 이렇게 재산을 정리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마 온 세계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재산 문제는 자기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포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현재 재산을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이 구원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당함으로써 어떤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건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어야 봅시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늘 옆에 있습니다. 우리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말고 그 등록금을 결식 아동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나요? 반드시 그래야만 우리가 회심했다는 증거일까요? 이런 현실의 삶에서 우리 모두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나 마더 데레사나 법정스님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절대적인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삭개오의 이런 말이 있은 직후에 구원을 선포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겉으로 드러난 삭개오의 말보다는 그 말에 담긴 마음을, 즉 회심을 보고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이긴 합니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각을 조금만 돌려 봅시다. 본문 안에 숨어 있는 어떤 다른 가르침이 있지 않을까요?우선 구원이 임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삭개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입니다. 본문5,6,7절에 보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 여러 사람들이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저 예수라는 친구 참 이상하군. 상종하지 말아야할 사람의 집에 들어갔네. 제 정신이야 뭐야. 이미 18장39절에도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잠잠하라"고 욱박지른 사람들이 있었고, 18장15절에도 예수님 부근에 몰려드는 어린이들을 꾸짖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렇게 뜯어말리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어린이들을 맞아들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시각장애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이런 긴장이 따랐습니다. 창녀, 세리, 무식쟁이와 아무 스스럼없이 만나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근거렸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예수님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사실과 진리를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경험은 곧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미 율법으로 주어진 답변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해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수군거리고, 때에 따라서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 삶의 자리에도 이런 현상은 늘 나타납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에게, 또는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에게 갖는 지역감정은 바로 이런 심리의 집단적 증상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적 미래를 내다보고 어떤 정치적 경향이나 철학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떨어뜨린다는 기준으로 선거를 합니다. 적의 적을 동지로 여기는 차원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도 역시 자기의 종교적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같혀있습니다. 그것의 강화를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가슴이 답답해지고 세계를 보는 안목이 좁아지고, 고집불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툭하면 "저 사람은 자유주의자야,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라고 수근거립니다. 다른 종교를 보는 시각도 너무나 경직되어 있습니다. 불교를 보는 시각이나 가톨릭을 보는 시각은 물론이고 개신교 안에서도 교단적 색채가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작용합니다. 자기들의 전통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어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는 단순한 기분에 따라서 "수군"거리듯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핵심은 "구원이 임했다"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두 진술입니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예상에 완전히 빗나가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원래 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구원은 세리같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같은 의인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인자는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만을 구원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구원을 규정하던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은 늘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을 깹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현상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자기 마음을 열고 대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즉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람은 수군대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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