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PlKFNI5mJOA?si=EJ6lpZyY-wVoQWyv
▣ 들어가는 말
- 『십자가에서 내림』
예수가 비참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예수의 제자들은 깊은 시름과 회의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죽기 전날 제자들과 식사하며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예고할 때도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베드로는 그런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지만,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합니다. 인류에게 보여주려는 가치 있는 삶은 사랑이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33세 청년 예수의 길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자들은 목숨이 두려워 모두 잠적해버립니다. 예수 곁에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이 있을 뿐. “강도”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십자가형은 정치범에 대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질서를 파괴하고 유대 독립을 꿈꾸는 혁명가일 가능성이 높지요.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은 15세기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그는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귀족들과 왕족들의 의뢰를 받았고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수출되곤 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고전을 기반으로 인간성을 부활하기 원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에 반해, 개신교를 기반으로 인간성 회복을 원했던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인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은 『십자가에서 내림』이라는 그림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예수의 죽음, 인간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보 참조)
- 숨은 제자
그림에서 왼쪽부터 어머니 마리의 사촌은 마리아 클레오파,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리아의 또 다른 사촌인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고통을 느끼며 옆으로 쓰러지는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시신이 보입니다. 예수의 뒤편에는 주황색 옷을 입은 니고데모가 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청년은 니고데모의 종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금빛 옷을 입은 부자 유대인 아리마대 요셉, 향유를 들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종이 있고 그림의 맨 오른쪽에 깍지를 끼고 절규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며 목숨까지 내놓을 것처럼 행동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바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데 비해, 예수 곁에서 마지막을 배웅한 인물은 바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 두 제자
- 십자가형의 의미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은 극악무도한 형벌입니다. 처형을 당하는 자는 공개적으로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며 처참하게 죽어가지요. 게다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시신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매달려 있는 시신 자체가 공개적인 수치요, 치욕이기 때문이지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시신은 맹금류의 먹이가 되거나 시신의 일부가 십자가에서 떨어져 대부분 들개의 차지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겪지 말아야 할 가장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정치범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구형할 때, 당연히 그는 예수를 십자가 위에 며칠 동안 그대로 놓아둘 심산이었을 테지요. 유월절에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확실한 경고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러한 관행을 깨고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매장하도록 허락합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요. 예상치 못한 두 명의 인물이 빌라도를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인물은 유대인 지도자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덤을 예수를 위한 무덤으로 기증하겠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한 사람을 더 등장시킵니다. 바로 바리새인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몰약과 향유를 준비해 빌라도를 찾아가지요. 예수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지금까지 주목받지 않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 아리마대 요셉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 27장, 마가복음 15장, 누가복음 23장, 요한복음 19장 등에서 언급됩니다. 마가복음에서 그를 “존경받는 공회원”이라 표현합니다. ‘존경받는’은 그리스어 ‘유스케몬’인데, 이는 ‘풍채가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풍채가 좋을 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뛰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력가를 표현할 때 사용하지요. ‘공회원’이라는 단어는 ‘불류테스’인데, 이는 1세기 그리스인들의 최고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의 일원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산헤드린은 서기관, 사제, 그리고 정치적이며 법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로마제국은 이들을 통해 유대를 간접 통치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리마대 요셉은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으며 동시에 상당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기다리다’의 그리스어 ‘프로스테코마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무작정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에 관한 내용인데, 여기서 메시아는 ‘고난받는 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성서학자들은 9절의 ‘부자’를 바로 아리마대 요셉으로 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자세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 경전인 『토라』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정통한 학자입니다. 위대한 랍비 힐렐은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 전체요, 나머지는 그 해설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지식인들은 이것을 가장 중요한 성경 해석의 원칙, 삶의 원칙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주류) 출신이 아닌 나사렛(비주류) 출신 예언자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소극적인 황금률(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이 아니라 파격적이며 적극적인 황금률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를 통해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여기라’는 말은 ‘신으로 섬기라’하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가장 불쌍한 자가, 별 볼 일 없는 초라한 자가, 우리가 흔히 삶에서 만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이웃이 바로 신이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나이도 많지 않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출신도 아닌 자의 가르침이 이리도 파격적이고 혁명적이고 전복적일 수가 있을까요.
아리마대 요셉은 청년 예수의 가르침에 충격과 놀라움, 매료되고 맙니다. ‘아리마대’는 지명인데, “높은 곳” “언덕”의 의미입니다. 성경 저자들이 굳이 “아리마대”를 반복해서 표기한 것은 분명 어떤 상징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높은 곳의 사람” 요셉이 “가장 낮은 사람” 예수에게 진리를 발견한 것이지요. 높은 곳에서, 저 천상의 세계에서, 우아하고 있는 자들의 세계에서, 높은 곳만 바라보던 사람이, 낮은 곳에서, 천한 곳에서, 이 부조리한 세계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진리를, 구원을 찾은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에게 드디어 그 나라가 나타난 것이지요. 그 세계를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지요. 그에게 예수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메시아인 거지요.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는 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예수의 시신을 양도받아 자신이 매장하고자 하지요. 이것은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행동입니다. 먼저, 로마제국의 방식대로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구하는 행위는 자신의 명예나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가 누렸던 유대 사회에서 모든 특권과 특히 산헤드린 일원으로서 가지는 권력을 잃을 수 있지요.
빌라도가 허락하자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립니다.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그날 바로 예수의 시신을 처리해야만 합니다. 준비해 온 고운 천인 세마포로 예수의 시신을 감쌉니다. 그리스어로 ‘오소니온’인데, 이집트에서 생산되어 고대 지중해 전역에 수출되는, 사제나 귀족들의 옷과 장례 같은 특별한 의식 때 수의로 사용되는 최고급 모시입니다.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27:60) 유대인에게 무덤은 가족의 명예와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무덤을 예수에게 바친 것은 신앙 고백과 다름없습니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은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아니라 땅에 매장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돌무덤은 직사각형의 돌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의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렸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런 형식의 무덤은 매우 드문 형태로 최고 권력자만이 누릴 수 있는 무덤입니다. 발견된 무덤 중 1%만이 굴릴 수 있는 돌로 입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장례는 일반 죄수의 방식이 아니라 왕의 장례처럼 치러진 것이지요.
- 밤의 방문자 니고데모
또 한 사람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를 몰래 찾았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요3:1)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한 유대 학자들인데, 히브리어로 ‘구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엄격하게 유대 율법을 지키고 경전 연구에 전념합니다.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 유대인들은 신앙의 중심을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에서 경전 연구로 옮겨가게 됩니다. 기원전 515년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지만, 경전을 공부하고 의례를 행하는 유대인 회당이 곳곳에 등장하게 되지요. 유대인들은 지역의 유대인 회당에서 금요일 저녁에 예배드릴 뿐 아니라 매일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 시간에 자유롭게 기도하고 월요일, 목요일 그리고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에는 『토라』 경전을 강독합니다. 성전의 의례 중심의 신앙이 경전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성전의 의례를 주관하는 것은 제사장이지만, 『토라』 연구를 인도한 것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이라는 의미의 ‘랍비’로 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구전 전통의 경전 해석의 권위자들이었지요.
“유대인의 지도자라” 회당을 책임지는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고, 산헤드린의 일원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 역시 아리마대 요셉처럼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부자였을 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니고데모는 예수를 서슴지 않고 “랍비”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라는 용어를 수천 년 동안 간직해온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모두 암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1세기 유대인 상황에 감동적으로 적용해 가르칠 수 있는 자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성서 해석에 있어 대단한 권위자들이지요. 그러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5:43-44) 듣지도 보지도 못한 탁월한 예수의 가르침에 충격과 놀라움,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 “구원이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에 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몰래 찾아온 것이지요.
예수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하시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이라는 ‘물’에서 태어나는 자연적인 탄생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탄생과 깨달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과 속성을 회복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나,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3:13-14)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메시아라 선언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하늘에서 온 것을 믿는다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것을 믿지 못하는가? 그 인자가 세상에서 할 일은 모세의 놋으로 만든 뱀과 같은 역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기대한 메시아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골고다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보고서 비로소 놋 뱀처럼 들려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요. 어쩌면 그 순간 니고데모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는 그리스의 ‘리코바리’라고 하는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부활절 연극을 위해 배역을 맡습니다. 만돌리오스는 예수 역을 맡는데, 처음엔 단순히 ‘연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터키 군인들에게 쫓겨 온 난민들이 도움을 청하자, 마을 사제와 지도층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난민들을 거부합니다. 이때 만돌리오스와 그의 동료들은 연극 배역을 넘어 실제로 난민들과 함께하기로 결단합니다. 예수의 길을 실제 삶에서 감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건 연극이 아니라 삶이다.” 그들은 난민과 빵을 나누며 자기 안전을 포기합니다. ‘역할’이 ‘소명’으로 변화한 것이지요. 그러나 권력과 결탁한 공동체는 그를 불온한 자로 규정하고 제거합니다. 유다 역의 파나이요타코스는 실제로 배신자가 되지요. 만돌리오스는 마침내 다시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연극이 끝나자, 진짜가 시작되었다.” 소설은 ‘예수의 고난’이 역사의 균열마다 반복됨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 “연극이 끝나자, 진짜가 시작되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나 니고데모의 몰약과 침향은 그것은 왕의 장례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예수에게 왕의 예우를 바치며, 세상 앞에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순간에, 깊은 어둠의 순간에, 모두가 실패라고 여기는 순간에 그들은 예수의 곁에 섭니다. 예수의 길이 진정한 메시아의 길임을, 실패가 아니라 위대한 성공임을, 예수야말로 진짜 메시아임을 드러낸 것이지요.
- 침묵의 파열
밤과 은밀함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기회가 아니라 때(카이로스)가 왔을 때, 신앙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선한 일을 하려는 단순한 윤리적 의지를 넘어, 때가 왔을 때, 정말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할 때가 올 때, 절체절명의 순간이 올 때, 진짜 내가 누구인지 내면에서 물음이 솟아날 때, 그때 우리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고,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기를 기도합니다. 삶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감추어져 있는 모습일지라도 그분 앞에서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종종 기념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기념을 통해 재현, 현존을 요구합니다. 성찬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인 것처럼 십자가 역시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부름입니다. “연극이 끝나자, 진짜가 시작됩니다.” 예배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기념하는 사람 되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을 존귀히 모시는 사람 되게 하소서.
두려움의 밤에서 담대함의 낮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값싼 위로를 버리고, 값비싼 순종을 선택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타자의 얼굴 속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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