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QrO5hjvldrw?si=gs3TbwKsPRYAYW3j
▣ 들어가는 말
- 시간이라는 재판관
“Hide nothing, for time, which sees all and hears all, exposes all.”이라는 시간에 관한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해석하면 “시간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숨기지 마라. 시간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들으며, 모든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Time, which sees all, has found you out.” 한국어 번역본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시간이 마침내 네 정체를 드러냈다.” 혹은 “시간이 결국 너의 죄를 밝혀냈다.”라고 번역된 구절이 확장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대부분은 잊히고 사라집니다. 한 시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상도, 유행처럼 읽히던 문장도 세월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말지요. 시간은 가장 강력하고 냉정하고 무서운 ‘무화(無化)’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의 엄격한 심판을 견디며 인간에게 말을 거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전’이라 부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 역시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위대한 고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은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고대 기록이 왕과 제국의 승리를 노래할 때, 성경은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도망친 모세, 눈물로 무너진 다윗, 의심하며 흔들리던 제자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이야기까지. 성경은 인간의 고결함보다 인간의 연약함을 먼저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낡아지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오랜 세월 동안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죄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증오하고 스스로 파괴합니다. 성경 역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답을 강요하기보다 질문을 남깁니다.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아브라함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나이에 신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 아닐까요. 모세는 불타는 나무 앞에서 ‘이야~ 신기하다’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는 것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성경이 살아남은 이유는 시대를 이기고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이 던지는 질문을 피하지 않고 그 앞에 정직하게 마주하려 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깨어있는 사람이고, 성숙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 광야의 시간과 인간의 유한성
- 광야의 시간
시편 90편은 전통적으로 모세의 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물의 이름이 붙은 시가 아니라, 광야를 지나던 공동체의 기억과 신앙이 녹아있는 기도문이지요. 광야의 시간은 정착민의 시간과 다릅니다. 도시의 시간은 축적과 성취를 향해 흐르지만, 광야의 시간은 기다림과 의존 속에서 흘러가지요.
회화에서 배경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배치/장치입니다. 빛과 색, 공간과 대비가 모두 주인공을 감싸고 있습니다. 배경은 두드러지지 않고 은밀하고 조용히 존재할 때 비로소 주인공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시간은 삶이라는 그림 속에서, 존재를 비추고 진실을 드러내는 배경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도시에서 시간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닙니다. 시계와 알림, 마감과 경쟁 속에서 시간은 폭군처럼 우리를 재촉하고 감독하며,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빼앗지요. 우리는 시간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춰 허둥지둥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시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반면 광야에서는 시간이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해와 바람, 계절의 흐름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다그치지 않지요. 그 덕분에 진짜 주인공이 드러납니다. 존재 자체가 두드러지고, 숨결이 느껴지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숨겨진 본질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지요. 도시의 시간은 폭군처럼 압박하지만, 광야의 시간은 주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감추어진 배경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90편에서 인간은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시90:3)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죽음을 말하는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티끌은 ‘하찮음’이나 ‘무가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 상징이지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흙(티끌)으로 빚으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표현은 우리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에게 지음을 받았는지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즉, 티끌은 허무의 상징이 아니라 뿌리의 상징입니다.
늘 분주하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끊임없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도시라는 배경이 아닌 광야라는 배경, 즉 물과 양식, 방향과 안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하는 배경을 구성합니다. 그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인간의 본질만 드러나게 한 것이지요. 그 광야에서 인간은 티끌에서 왔고 결국 티끌로 돌아갈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티끌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깨닫지요. 허무의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뿌리를 밝히고, 존재의 근원을 일깨우는 표현이지요. 우리는 작고 연약한 티끌과 같은 존재이지만, 바로 그 한계와 유한함 속에서 삶의 빛과 아름다움이 두드러집니다. 티끌과 같은 유한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순간순간 찬란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사랑, 행동과 선택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유한하기에 소중하고, 사라지기에 더욱 빛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지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מָנָה(마나)’는 단순히 숫자를 세는 행위가 아닙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같은 객관적인 시간의 양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티끌과 같은 존재로서 우리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바로 그 유한함 속에서 매 순간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작고 연약하지만, 유한하기에, 그리고 사라질 수밖에 없기에, 하루하루를 온전히 살아가는 순간마다 존재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인의 이 고백 역시 단순한 안식이나 의존의 표현을 넘어서 삶의 본질과 유한함을 깨달은 자의 내적 반응이지요. 광야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외적·물질적 기반에서 벗어나 본질과 마주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도시의 속도와 욕망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삶의 깊이가 광야에서 드러납니다. 인간은 티끌과 같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제한 속에서 삶의 찬란함과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과 환경, 혹은 외적 조건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덧없는가를 알게 된 인간은, 결국 찰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존재의 기반을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 누가복음 18장
- 가장 낮은 고백, 가장 높은 고결
예수께서 들려주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경건한 신앙인의 전형이고, 세리는 로마 제국의 세금을 대신 거두는 비열한 협력자로, 종교적 사회적으로 가장 멸시받는 하찮은 사람이지요. 문제는 청중의 마땅한 기대와 달리 예수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하는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고 무너진 존재임을 적나라하게 인정합니다. 이 고백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자기 인식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감정적 후회가 아닙니다. 세리는 자기 삶을 변명하지도,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내려놓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복음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한 고백이, 가장 높고 고귀한 의로움의 선언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스스로 높이려 할 때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리, 오히려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는 순간 열리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루소가 말한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수 있는 인간의 지위’ 아닐까요. 그것이 세리의 기도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높이려 할 때 더 깊은 모순에 빠지지만, 자신이 비천함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자유로워집니다. 의로움은 올라가는 길이 아닌, 내려가는 길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이 역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드러납니다.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 믿습니다. 그는 위대한 인물들은 도덕적 법칙을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사상을 시험하기 위해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해 더 큰 선을 이루는 존재라고 스스로 설득하지만, 범죄 이후 그의 내면은 점점 무너져 내립니다. 열병과 환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이 양심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소설의 중요한 전환점은 사랑하는 여인 소냐에게 자기 죄를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소냐는 그에게 단순히 법적 처벌을 받으라 하지 않습니다. 대신 광장 한가운데서 땅에 입을 맞추고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권합니다. “지금 즉시 나가서 네거리에 서서 절을 하고, 다음에 당신이 피로 더럽힌 이 대지에 키스하세요.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고 외치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거예요. 가실 거죠? 가시겠지요?” 그 장면은 굴욕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라스콜니코프가 처음으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정말 내가 노파를 죽인 것일까? 난 나 자신을 죽인 것이지 노파를 죽인 게 아니야! 그때 난 단번에 나 자신을 죽여 버린 거야. 영원히 말이야…!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였지. 난 악마였어…” 그는 자신의 우월함, 특별함을 내려놓고,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받아들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고결함은 자신을 높이는 데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의롭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를 의롭다고 하지요. 복음의 깊은 역설입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고백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고결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것이지요.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 고백을 다시 배우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더 나아지고 더 높아져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지만, 십자가와 죽음, 부활을 향해 가는 예수의 걸음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지요.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길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어둠을 직면할 때 비로소 빛을 향해 열립니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언어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순간, 인간은 처음으로 고결함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기도는 결코 비천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고도 고결한 고백입니다.
▣ 빌립보서 2장
- 케노시스와 로마 제국의 문화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자리
빌립보서는 단순한 개인적 권면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강한 문화적 영향 아래 있던 공동체를 향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요한 로마 식민 도시(colonia)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정착한 도시이고,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매우 자랑스러워합니다. 거리에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고, 사회 질서는 명예와 위계, 충성의 논리로 유지되지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는가, 누가 더 영광을 차지하는가가 삶의 중요한 기준이지요.
이런 배경 속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매우 낯설고도 급진적인 메시지입니다. 로마 문화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수치로 여겨집니다. 승리와 상승, 자기 과시는 미덕이지만, ‘종’의 자리는 가장 낮은 위치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자기를 비워”(빌2:7) 종의 형체를 가지신 분으로 노래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겸손의 미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선언입니다. 황제가 스스로 신적인 존재로 높이던 시대에, 하나님이 인간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고백은 제국의 언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복음이지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세운 공동체입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 감옥 간수와 그의 가족 등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던 교회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도 갈등과 경쟁의 흔적이 보입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2:3)라고 권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즉 케노시스 찬가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실천 제안입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은 “케노시스” 즉, “그리스도 찬가”로 불립니다. 케노시스는 ‘자기비움’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케노시스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영광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낮아져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 죽음까지 순종하신 자기 비움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구속 사건의 중심이고, 예수 삶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 방식입니다. 반역자나 노예에게 사용되던 형벌이었고, 시민권자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십자가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자, 사회적으로 추한 자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시간 속에서 가장 낮아진 사건이, 역설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케노시스는 단순한 도덕적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비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때, 고결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로마 시민권을 자랑하던 도시 한가운데서 “하늘의 시민권”(3:20)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제국의 영광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신 그리스도의 길 위에서 새롭게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 케노시스의 길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상승의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낮아짐의 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결함은 높이 올라갈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스스로 비울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 인간의 역설 : 추함과 고결함 사이에서
인간은 무엇보다 고결할 수 있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추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떠올려 보십시오. 돌아온 아들은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강조한 것은 아들의 실패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입니다. 인간의 비천함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사랑의 고결함이 시작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내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끝없이 흔들리지만, 자신의 어둠을 직면하는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 직면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더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정직해지기 위해 이 계절을 지나갑니다.
- 시간 속에서 열리는 고결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의 끝에서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광야, 세리의 기도, 케노시스의 십자가는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완벽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해질 수는 있습니다. 자신의 비겁함과 유한성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고결을 향한 문이 열립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낮추기 위한 계절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계절입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배우게 됩니다. 고결함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빚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시간을 이기지 못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시간 앞에 선 우리의 삶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의 숨결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낮아짐의 길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들보다, 사랑과 자비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게 하시고,
사순절의 이 여정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다시 숨 쉬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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