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지금 어둡고 침침한 어떤 감옥의 골방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당하면 무언가에 대해서, 혹은 누군가를 향해서 원망하거나 신세타령에 빠져있을 법한데, 바울은 오히려 영적으로 훨씬 깊은 세계에 들어간 셈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로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이 신앙적으로 큰 감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 닥친 불행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위대한 사건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조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바울이 당한 감옥과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그런 상황에서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결국 그런 삶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나와서 잘 먹고 잘살다가 죽는다’라는 그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허무한 삶이죠.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생각을 집중시켰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15절).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이것은 곧 신앙의 외면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이 기독교인의 신앙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은 이 "빛"이라는 단어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빛은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칭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디모데 전서에서 그리스도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딤전6:16). 그 이외에도 복음서에만 수십 군데나 이 빛에 대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 21).
신약성서만이 아니라 교회 전통도 역시 이런 빛의 메타포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태양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된 12월25일에 탄생하셨으며, 태양의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전통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바로 세상의 빛이어야 한다는 확신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빛이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역시 초대 교회의 이런 전반적인 생각과의 연관 가운데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겉모습에 대한 매우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빛을 오늘 우리보다는 훨씬 인상깊게 경험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어두운 감옥 속에 갇혀 있는 바울은 오죽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물리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었던 그들은 태양으로부터 시작되는 빛이라는 현상 앞에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태양 빛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며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모든 고대 종교는 태양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이집트 문명이나 잉카 문명도 역시 이런 태양신을 숭배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는 태양과 그 빛을 하나님으로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초대 기독교인의 생각을 강하게 사로잡은 빛이라는 메타포는 기독교인이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인식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아주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으로서의 빛이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의 살아가는 실제적인 모습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만 하거나 아니면 광야에 나가서 금욕생활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진지하려면 우리의 살아가는 전체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비하고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 확신이거나, 혹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에서 빛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빛이라고 생각할까요? 세상은 과연 교회와 그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명의 근원인 빛과 연관해서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적인 외면은 빛으로 확실하게 나타납니까?
바울은 오늘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러한 신앙의 외면을 설명해 줍니다. 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마틴 루터 번역에는 불평과 의심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혹은 의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 원망과 시비가 분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외쳐집니다만 사실 그 초대교회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전한 대안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공동체 안에도 시비가 분분했고, 사도들이 목회하던 교회도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로 나뉘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빌립보 교회도 그런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4장2절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빌립보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망과 시비, 불평, 의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곧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야 할 신앙의 외면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의 내면이 보이는 외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현상인 셈입니다.
바울의 충고는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합니다. 개인이나 사회가 원망과 시비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아주 확실합니다. 정당과 정파는 어떤 논리도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사회 계층 간에도 이런 원망이 쌓여갑니다. 예컨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매우 심각하게 사회 문제가 되는 의약분업에 얽힌 일들만 생각해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고, 국민은 의사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정부는 드러내놓지는 못하지만 내심으로는 보험료를 적게 내려는 국민과 의료수가를 높게 받으려는 의사들에게 이런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착하게 보이고 상당히 높은 지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고 교양도 있고 신앙도 있습니다만 서로 원망과 의심을 계속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원망과 시비와 의심은 참으로 그 뿌리가 깊고 그 폭이 넓습니다. 원망과 의심은 인간의 교양이나 계몽에 속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에 속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밖에서도 인간은 늘 이렇게 서로 원망하고 의심하고 불평합니다. 이런 것은 그가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아니면 삶의 조건이 좋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닙니다. 일종의 원죄와 같다고나 할는지요. 그렇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자 아담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살게 된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을 뿐입니다.” 아담은 결국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답변했습니다.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최초의 인간들이 내보인 이 행태는 인간 역사를 계속해서 지배했습니다. 아마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이렇게 원망과 시비를 일삼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바울이 지금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아,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구나."하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립니다만, 바울은 그런 율법과 윤리를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으로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를 들여야 보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곧 인간은 남에게 불평하기 전에 이미 자기 삶을 원망하고 의심한다는 사실입니다. 늘 불안하죠. 존재 불안이라고나 할까요? 자기가 자기 자산을 불신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늘 사심에 빠져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느냐는 차원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당연히 원망과 시비에 휩싸이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인간의 이기심과 연관되며, 더 나아가서 인간의 죄에 연결됩니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은 그저 모든 게 다 좋다는 식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까 그저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런 것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일에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일은 따져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하지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면죄부나 교회 무오성 같은 로마 교황청의 많은 문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원망과 불평과 의심으로 한 게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만 민감하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겁한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심 없이 오직 하나님에게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이익이 온다고 하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사심을 버리는 사람만이 이 바울의 가르침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 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점잖게 보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원망과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를 뿐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역시 이런 원망과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이런 원망과 시비를 극복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목사와 장로가, 장로와 집사들이 서로 원망하고 의심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외면은 외면 자체로 완성된 게 아니라 그 내면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이 말씀에 진지하려면 이런저런 교양강좌를 쫓아다닐 게 아니라 신앙의 내면에 충실해야 합니다. 외면은 내면이 드러나는 것뿐이지 내면으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신앙의 내면을 빌립보서의 주제이기도 한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7,18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곧 기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아마 죽음을 의식했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 피를 뿌릴 수도 있다고 비장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사실 바울에게는 죽는 일과 사는 일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왕에 죽을지도 모를 운명이니까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현실들을 생각하고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삶의 현실은 바로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은 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원망하고 시비를 걸고 의심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참된 기쁨이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빛나게 삽니다. 바울처럼 비록 감옥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신앙과 사랑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컨데 어떤 젊은 남자가 애타게 짝사랑하던 여자에게서 한번 만나서 사귀어보자고 연락이 왔다고 합시다.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합시다. 이 남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 남자의 눈에는 하늘도 아름답고, 산도 아름답고, 자기에게 잔소리를 하던 어머니도 사랑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큰 기쁨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큰 긍정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볼 힘이 바로 기쁨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환희에서 자기의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입니다. 자기의 삶을 긍정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내면에서 어떤 생명력이 꿈틀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만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이나 시비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궁핍은 바로 삶에 대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사는 것 자체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어서 기쁨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맙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젊은 남녀의 결혼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식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배우들처럼 사진을 찍고 패션모델처럼 옷을 차려입고, 이런저런 관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결혼식을 치릅니다. 평생에 한 번이니까 그렇게 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결혼식을 치르는 이들이 모두 비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과장된 행동들은 결국 결혼 자체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결혼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그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게 어디 결혼 문화뿐인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바로 이렇습니다. 교회의 행사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런 거품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이벤트 회사처럼 행사에 매달린다는 사실은 무언가 본질적인 것, 즉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난 1년 동안 독일에서 생활한 느낌을 우리 사회와 비교해서 잠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정치, 교육, 문화와 예술, 의료, 사회, 종교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20년 전에 보았던 독일 대학교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때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서 살고, 비슷한 것을 먹고 공부합니다. 헨드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초중고 학생들도 헨드폰을 갖고 다니는 것과 비교하면 독일은 아주 미개한 나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헨드폰이 별로 필요 없을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우리는 일단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다, 학원이다 해서 돌아다녀야 하니까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헨드폰이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독일에서는 학생들이 그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지난 2월 말에 서울의 종로2가 뒷골목과 인사동 골목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늦은 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부딪쳐서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반드시 독일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우선 진지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만은 배워야 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내면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참된 삶의 내면은, 그 신앙의 내면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이 이런 내면적인 기쁨으로 집중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삶의 환경 가운데서도 불평과 의심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삶의 능력을 강하게 만드는 이 내면의 기쁨은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바울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까? 앞서 예를 든 대로 사랑하는 여자나 남자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궁극적인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여자나 남자와 결혼한 사람들은 그런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영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아주 쉽게 요동친다는 사실을 경험했을 겁니다. 그 이외의 모든 인간의 성취도 역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에 참된 생명의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부활에 닿아있었습니다. 빌3:21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자기의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바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초였습니다. 어떤 분은 부활은 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부활을 그 무엇보다 확실한 현실성(Wirklichkeit)이라는 생각에 따라서 시작되었고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최종 목표인 부활의 기쁨을 알고 믿고 희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원망과 시비와 의심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역으로 인생을 원망과 의심 가운데서 허비하는 사람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기쁨은 신앙의 내면입니다. 이 기쁨에 기초해서 우리는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인들의 삶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야 할 신앙의 외면입니다. (2001.3.25. 수성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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