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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2007.03.04. 눅 13:31-35
실패의 길을 가자!

십자가는 왜?
예수님의 일생은 아주 짧습니다. 겨우 33년입니다. 천수를 다 한 부처님이나 공자님에 비해서 형편없이 짧게 사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영역도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라신 곳은 가나안의 북서쪽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갈릴리 호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인접한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들어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체포당하시고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바로 그분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인간이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까요? 스스로 택한 길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길인지요? 이런 질문을 왜 하느냐,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냥 믿고 싶은 분들은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분들이라면 질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훨씬 깊은 곳으로 끌어들입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컨대 큰 능력으로 이 세상의 악을 싹쓸이했다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무조건 따라간 것일까요?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고 오래 살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칠 생각을 없었을까요? 신약성서는 이런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부활의 빛이라는 신앙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주 드믄 경우지만 이에 관한 약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따르면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복음서는 일반적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예수님과 적대적인 사람들로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호적인 것으로 나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실제로 보호하고 싶어 한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들이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들은 헤로데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헤로데로서는 지역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가 바리사이파 몇 사람을 예수에게 보내서 “까불면 재미없어!” 하는 식으로 겁을 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이 헤로데는 누가복음에 몇 번 등장합니다. 9:7-9절에서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매우 불안해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헤로데가 목 베어 죽인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문을 듣고 불안하지 않을 수 는 없었겠지요. 헤로데는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체포당하신 예수님이 유대 법정인 산헤드린을 거쳐,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다음, 헤로데에게 넘겨집니다. 예수님이 헤로데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빌라도가 마침 그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의 자문을 얻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누가는 헤로데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끌어내지 못한 헤로데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23:6-12) 어떻게 보면 헤로데와 예수님은 악연이라면 악연입니다. 헤로데도 왕이고 예수님도 왕입니다. 헤로데는 정치적인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다는 몇몇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충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헤로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 사실을 전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을 훼손하는 예수님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정체, 경제, 사회의 핵심인 성전을 상대화하는 예수님을 더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역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빌라도가 주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로마의 최고위급 정치인인 빌라도가 그런 압력에 의해서 정치적인 오점을 남길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 나라가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평화에 지장을 받는다고 판단했겠지요.
이스라엘의 민중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한때는 예수님을 구름떼처럼 따르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세금을 내려주거나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성취해주는 일들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생명을 말씀하는 예수님에게 그들이 계속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눅 9:58) 단순한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그가 처한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현재와 같은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체제 안에서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무언가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 체제와 ‘맞짱’을 뜨냐,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고 은둔 하냐, 하는 선택의 강요입니다.

내 길을 가야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여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32,33절)
이 말씀은 조금 복잡합니다. 오늘과 내일, 사흘째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32절과 33절 사이에 약간의 모순도 보입니다. 32절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사람들을 고치고 사흘째 모든 일이 끝나게 되는데, 33절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일이 진행됩니다. 전자는 예수님의 일이 완료되는 것으로, 후자는 지속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문장은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이고 일치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은 끝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 일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인류 구원의 길을 내셨고, 그 일은 계속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감당한 몫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체제가 먹구름처럼 예수님의 삶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충고와 위협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축귀와 치병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악한 영이 쫓겨나고 인간을 억눌렀던 모든 체제가 제거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살해 위협 가운데서도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서가 표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만 본다면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니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땅히 십자가를 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믿고 있지만 원래의 십자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입니다. 반로마, 반정부, 반사회적인 중범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형법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스스로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저녁에 기도하시면서 가능하면 이런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했으며, 다음날 십자가에 달린 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했습니다. 만약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면 왜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런 소리를 외쳤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이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마당에 예수님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기도를 드릴 리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훨씬 근본적이었습니다. 민중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악한 영을 쫓아냈지만 그들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무능력만 확인될 뿐입니다. 더구나 자신을 없애버려야겠다는 소문이 강하게 들리는 걸 보면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자칫 이런 방식으로 무조건 앞으로 나가다가는 개죽음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왜 단 한순간만이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한 순간이 아니라 그의 공생애 3년 동안 이런 생각을 계속하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걱정하던 대로 예수님은 결국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민중을 선동해서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었고, 그들을 계몽해서 내면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없었고, 더구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설득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를 간단하게 처리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이 완벽한 승리자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총본산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흑막이 숨어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이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가장 종교적인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성지입니다. 그들은 가장 경건하고 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들을 계속했습니다. 34절에 의하면 예언자의 도시가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이게 인류 역사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합니다.
예루살렘과 맞설 힘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 무슨 뜻입니까?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예루살렘과의 싸움에서 실패할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그가 “실패를 향하여!”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의 길은 곧 그렇습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십자가 처형이 현실로 다가왔지만 예수님은 그 길로 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신뢰이며, 순종이었습니다. 그런 신뢰와 순종의 결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실패의 길을 가신 예수님은 이제 참된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미 앞서 그런 길을 가셨던 주님이 여러분을 돕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아멘.
누가복음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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