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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사순절 셋째 주일, 201538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젊디젊은 삼십대 초반입니다. 불교 창시자인 부처나 유교 창시자인 공자 같은 이들은 천수를 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십자가 처형 자체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로마 실정법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치범에게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차라리 돌에 맞아 죽었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산헤드린 종교재판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 과정에서 제자들이 비겁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런 충격의 결과입니다.

 

십자가의 스캔들

십자가 사건 앞에서 받은 제자들의 충격은 그 뒤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23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이 구절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우리라고 하는 기독교인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고, 그 다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스칸달론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스캔들이라는 영어가 이 헬라어에서 온 겁니다. 스캔들은 남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리킬 때 쓰입니다. 일종의 추문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 성경이 거리끼는 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옳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리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 3:13절에서 이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는 모세오경인 신 21:23절의 인용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큰 죄를 짓고 사형당한 이의 시체를 일정 시간 동안 나무에 달아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부관참시와 비슷한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조치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그 시체를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놓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이의 시체로 인해서 땅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와 신명기가 말하는 나무는 둘 다 사람을 매단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만 그 잔인성이라는 점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는 사형에 처해진 사람의 시체를 일시적으로 나무에 달아놓으라고 했지만, 로마법은 처음부터 사형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빨리 죽이지도 않습니다. 손에 못을 박아놓고 피가 흘러나와 죽을 때까지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보통 건장한 남자는 보름 정도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죽어도 시체를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이 뜯어먹도록 내버려둡니다. 이런 사형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건지는 로마 정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십자가 처형을 실행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저항한 반국가 사범들 중에서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눈에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로마 제국에 저항한다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어리석습니다. 하나는 이 저항이 승산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로마는 막강합니다. 특히 그들의 군사력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로마를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무모하게 칼을 들고 나선다는 것은 만용이고, 미련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이 당시에 정의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 , 군사, 의학, 예술, 철학,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로마 문명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 까지 사회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의를 확보하고 있는 로마 체제에 도전하다가 십자기에 달려 처형당하는 일은 미련한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생각과 전혀 달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외칩니다. 그 사실을 24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놀라운 발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바울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 열정과 깊이에서 뛰어났던 유대인들의 생각을, 그리고 정치와 사상과 예술의 깊이가 탁월했던 로마 헬라사람의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생 실패의 본보기인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라고 외치는 바울을 지지할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겁니다. 바울의 발언은 무슨 근거가 있을까요? 아니면 종교 열광주의자의 독백에 불과한 것일까요?

 

지혜의 한계

바울은 세상이 말하는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지혜는 헬라어 소피아입니다. 모든 민족은 다 이 소피아를 진리의 근거로 여깁니다. 유대인들도 지혜를 말하고, 헬라인들은 더더욱 지혜를 말합니다. 철학(philosophy)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와 지혜를 가리키는 소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려고 최선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그리고 미련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지혜가 과연 옳으냐, 하고 따지고 듭니다. 본문 19절에서 사 29:14절을 인용해서 세상의 지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어서 20절에서 그는 더 밀고 들어갑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 있으며,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열거한 사람들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요즘 말로 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선생,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목사, 휴머니스트, 변호사 등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냉소주의자가 아닙니다. 자타가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실체를 뚫어본 것뿐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도 바울이 열거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넘쳐납니다. 그들이 개인과 사회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나름으로 성실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주는 게 나을만한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봅시다. 모두 선한 의도를 갖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무엇이 달라질까요? 겉모양은 약간의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근본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옛날에 비해서 지금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새로워졌을까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부분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혜라고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피조물인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우리는 선의를 갖고 일을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전체에 대한 통찰 없이 부분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노벨이라는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노벨상을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노벨 이후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칼과 창으로만 쓰다가 이제 총과 폭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생명의 위험성이 높아집니다. 소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간성과 그 연대성은 취약해집니다. 스마트 폰이 이렇게 일반화되리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으로 사람들이 더 친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갑니다. 이런 걸 예로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본문 22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원의, 즉 생명 완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헬라인들에게 해당되는 지혜가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많은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구약성서에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에 얽힌 일화들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것들입니다.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표적으로 삼을 것이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표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기적과 표적을 모두가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스캔들이었으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우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능력은 헬라어 뒤나미스입니다. 본문인 고전 1: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번역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뒤나미스 데우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보통 다이내믹하다.’고 할 때의 그 다이내믹입니다.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다이너마이트도 이 단어에 온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폭발적인 생명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능력은 사람이 재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표적과 지혜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본문 고전 1:21절에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표적과 지혜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의 눈에 그것은 거리낌의 대상이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인지, 즉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바울의 주장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믿고 죄 용서 받아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초보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죄의 용서를 가리킵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도둑질, 살인, 폭력, 분노, 전쟁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인류는 늘 이런 것들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보려고 많은 일을 시도했습니다. 윤리와 도덕 명제들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철학도 포함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죄를 무지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깨우치면 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표적과 헬라인들의 지혜가 다 이런 시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인류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 용서의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고 인격적으로 산다고 해서,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계속해서 강조된 것인데, 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간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워졌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때 전제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것은 표적과 지혜로 우리가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생명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죄의 결과인 죽음은 극복되었습니다. 부활의 승리 앞에서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죽음은 더 이상 거리낌의 대상이 아니고 미련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보다 더 소중하거나, 더 결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 전체는 사순절입니다. 마지막 때 완성될 부활 생명을 앞두고 있으나, 그 이전의 시간을 살아내야 할 이 현실은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의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빛이 은폐의 방식으로 비추고 있는 것처럼 이 사순절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도 부활 생명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8-25
https://youtu.be/XQw39OHTz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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