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19년 7월14일
3.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저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초기 기독교인들과 그것을 읽는 우리와의 사이에 놓인 2천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합니다. 아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경험을 이해하려면 신약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게 최선입니다.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골 1:3-14절 중에서 13절과 14절만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선입견 없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네 개 나옵니다. 흑암의 권세, 아들의 나라, 속량, 그리고 죄 사함입니다. 속량과 죄 사함은 같은 뜻이니 세 개로 봐도 됩니다. 이 문장을 줄여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았다, 또는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더 줄이면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지만, 흑암의 권세, 아들의 나라, 죄 용서가 우리에게 실재(reality)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궁극적인 실재에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 사태를 눈치채지 못해서 추상적으로 느낄 뿐입니다. 우주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주가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저는 일종의 우주 천문학자로서 여러분에게 우주의 실재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중입니다. 우주 천문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선 본문이 말하는 흑암의 권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흑암의 권세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말은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흑암의 권세는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며 퇴폐적인 권세로 보입니다. 거짓말, 분노, 폭행 등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흑암의 권세에 속한 목록이 종종 거론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 5:6절 이하에서 육체적인 일과 성령의 열매를 구분해서 열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육체에 속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살면 좋고,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흑암의 권세를 그런 차원에서만 보는 건 성경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 일들은 양심과 상식의 차원에 속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궁극적인 실존 자체를 흑암이라고 봅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아는 게 없습니다.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식인들에게 그런 행태가 자주 나타납니다. 옛날보다 오늘 우리의 지식이 늘어난 건 분명합니다. 지식은 우리의 삶을 확장해줍니다. 옛날에는 귀신이 들렸다고 본 현상이 이제는 정신병으로 밝혀졌습니다. 전염병이 악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균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세균은 불에 약하니까 음식과 식기를 고열로 처리하면 전염병이 크게 줄어든다는 사실도 과학적 지식입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메커니즘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여전히 모릅니다. 오는 주일에 새 교우 환영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교회에 정식 교인으로 등록했는지에 관한 정보는 알 수 있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모릅니다. 가족관계도 그렇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한편으로는 신비이고, 다른 한편으로 흑암입니다. 인식의 절대적인 한계를 안고 산다는 뜻입니다.
둘째,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만족을 얻기 위한 결과입니다. 돈벌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술과 학문 활동과 연예 오락과 여행 등등, 모든 인간 행위는 나름으로 만족을 제공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아도 그것으로는 사람이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잠깐의 즐거움입니다. 맛집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는 경우와 비슷한 경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딜레마입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쓸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궁극적인 만족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런 딜레마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흑암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실존이 흑암의 권세에 빠진 거와 같다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우리의 삶에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단하게 먹고사는 이 현장이 그런 문제를 생각할 만큼 한가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생각이 확고하다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굳이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재미있게 먹고사는 문제는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국가의 경제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상과 체제가 기독교 신앙보다 이런 점에서는 더 뛰어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이 세상의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즉 행복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찾는 믿음 생활은 자신의 실존을 절체절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성립됩니다. 자기가 자기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잘나고, 아는 것도 많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절체절명의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살면 됩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흑암의 권세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압니다.
아들의 나라
본문은 흑암에 빠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 사건을 가리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골 1:15-20절에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찬가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찬가를 오늘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듯이 예배의 의식문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술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진술로 끝납니다. 마지막 구절인 20절만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빠져나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생명과의 화해입니다. 화해는 불화를 전제합니다. 하나님과의 불화, 즉 생명과의 단절 원인은 죄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놀라운 일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아들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곧 골 1:14절이 말하는 죄 사함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 아무개에게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이 아무개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서 갈라섰습니다. 더 이상의 소통이 없습니다. 이전에 느꼈던 우정과 사랑과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김은 다른 친구를 중간에 넣어서 자신의 진심을 이에게 전했습니다. 이 친구는 진정성을 담아서 이에게 김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아무개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우정을 회복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죄 사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위에서 말씀드린 비유보다는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비유가 더 적합할 듯합니다. 눅 15:11-32절에는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미리 챙겨서 아버지의 영향력이 없는 타국에 나가 돈을 허비했습니다. 그는 돼지 농장에 가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그의 삶은 흑암의 권세 아래 놓인 겁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살겠다 작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면서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책임을 묻지 않고 무조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돌아왔으니 모두 기뻐하자는 겁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했고, 아들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양쪽에서 더 계산할 일은 없습니다. 일방적이고 조건 없는 용서입니다.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기에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죄 사함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진 삶입니다. 생명 충만의 삶입니다. 자유의 능력이고 평화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삶입니다.
죄 사함
바울은 골로새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편지에서도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5:18절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19절 말씀을 ‘영어-평양말 대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그분 자신과 화해시키고, 더 이상 사람들의 죄를 그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시면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화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죄는 자신의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려는 욕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말을 자랑스레 합니다.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살겠다는 의미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초등학생 아이가 부모에게 지금 당장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형국과 비슷합니다. 그 아이가 부모의 도움 없이 생존하려면 거지 생활을 해야겠지요. 어떤 점에 우리는 지금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사는 듯이 보여도 사실은 거지처럼 삽니다. 여기저기에 계속 손을 벌리면서 삽니다. 늘 허기가 진 상태입니다. 늘 걱정거리를 머리에 이고 삽니다. 영혼이 궁핍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죄 사함은 삶의 가장 궁극적인 실재에 속한 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단은 지구입니다. 지구의 생명 조건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끔 우주 공상 영화에 금성이나 화성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시설물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형 유리 온실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 1억 년 후에 이 프로젝트가 실현될지 모르겠으나, 그리고 그 프로젝트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지구의 생태 조건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노력 없이도 지금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완벽하게 만들어진 생태 조건에서 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 생명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죄 용서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죄 사함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즉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한 조건들을 잃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가족, 건강, 직업, 친구 등등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조건을 하나만 짚는다면 가난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설교 시간에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중요한 주제라 생각해서 오늘 한 번 더 짚겠습니다. 성경은 가난을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비현실적이든지 우리에게 믿음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난 자체를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넉넉한 생활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생명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가장 궁극적인 복입니다.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재물에 자신의 운명을 걸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 년 재정이 지금 8천만 원 내외입니다. 만약 80억 원의 재정으로 늘어난다면 신경 써야 일이 수없이 많아질 겁니다. 재정 문제로 다툼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교회다움을 잃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수준으로 재정을 허락하실 겁니다. 조금 늘어나도 좋고, 조금 줄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재정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런 죄 사함이 ‘그 아들 안에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읽은 골 1:20절에서 확인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했으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체제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뻔뻔하게 살아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이나 다른 체제를 통해서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일로 약올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사람은 다른 일에서 조금 손해를 봐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아들을 통한 속량과 죄 사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문자로만 알았지 실제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세상의 상식과 교양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갈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아무리 괜찮아 보여도 흑암의 권세 아래 놓였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즉 죄 용서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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