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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악령과 예수

1:21-28, 주현절 넷째 주일, 201521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오늘 제3 독서인 막 1:21-28절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더 나가서 오늘날에도 똑같은 현상이 재현된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주술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꾸로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이야기라고 폄훼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일단 그의 설명을 따라가겠습니다.

 

말씀의 권위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자리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로서 율법의 요체였습니다. 안식일에 모든 유대인들은 노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을 지피지도 말아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일정한 거리 이상을 걷지도 말아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편의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했습니다. 회당 예배의 중요한 순서는 구약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설교와 비슷했습니다. 회당 관리자가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자유롭게 말씀을 읽고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아무나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날에는 예수님이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것을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설교와 서기관의 설교가 여기서 비교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에게는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 영역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 그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좀더 아는 것을 절대적으로 아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신학 영역에서 나름 전문가로 활동합니다. 목사로서 설교도 하고, 신학대학교에 강의도 나갑니다. 세월이 갈수록 나의 전문 지식이 여전히 미숙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한정적인 지식에 묶여서 설교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서기관들의 설교에 권위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짝퉁 보석만 보다가 진품 보석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복사 그림만 보다가 원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교훈, 즉 그의 설교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들이 왜 놀랐는지, 왜 예수님의 권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는지를 딱 집어서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서기관들의 설교보다 신학적으로 깊이가 더 깊었을지 모릅니다. 신학적인 깊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런 것으로 놀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학적인 깊이로 인해서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진정성이 돋보였지 모릅니다. 진정성이야 서기관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의 양심을 울리는 설교를 하신 걸까요? 그런 설교를 들으면 양심이 찔리고, 그래서 설교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을 흔드는 설교는 서기관들이나 선지자들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들로 예수님의 설교에 전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권위라는 단어는 헬라어 엑수시아의 번역입니다. 영어로는 authority, 또는 super natural power이라고 하는데, 루터는 좀더 강력한 뉘앙스가 담긴 독일어 Vollmacht로 번역했습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현대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도 살아가면서 이런 엑수시아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겁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영적 빈곤이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삶을 무료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매너리즘입니다. 삶의 역동성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현대인들에게 신경질환이 옛날에 비해서 더 많은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매너리즘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매너리즘을 피하기 위해서 세상의 작은 것들에 집착합니다. 지금 저는 일상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과도하게 몰입됨으로써 결국은 삶이 파괴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악순환이 있습니다. 전권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삶의 상투성에 빠지고, 그걸 피해보려고 과도하게 일상에 집착합니다. 그런 삶이 다시 전권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그런 모든 일상을 뛰어넘는, 그래서 자신들의 영혼이 환하게 밝아질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놀라움입니다. 그런 경험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저는 아직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문가인 서기관들의 설교와 예수님의 설교의 차이점에서 핵심적인 것을 짚어야겠습니다.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들은풍월을 설교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였습니다. 들은 게 아니라 본 것을 설교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차이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8:38). 여기 두 사람이 티베트에 대해서 말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쓴 여행기를 읽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직접 갔다 와서 말합니다. 읽고 들은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해도 직접 갔다 온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 하나님을 직접 본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의 통치와 일치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마치 동네 바둑을 두는 사람과 프로 바둑을 두는 사람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동네 바둑을 두는 사람의 한 마디와 프로 바둑을 두는 사람의 한 마디는 수준 자체가 다릅니다. 서기관들의 설교만 듣던 당시 청중들은 예수님에게서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말씀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놀람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대상에게 완전히 일임할 수밖에 없는 경험입니다.

 

악령의 굴복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이런 전권이 설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 행위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23절 이하에서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전합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왜 자신들을 멸하려고 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었고, 그러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보고 사람들은 다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전권에 대해서 말합니다. 설교를 듣고 일으킨 반응과 똑같습니다. 27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귀신에 얽힌 이런 이야기를 읽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저게 뭐지?’ 하고 질문합니다. 귀신이 정말 존재한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엑소시스트(퇴마사)라는 말인가, 하고 궁금해 합니다. 고대인들은 정신병에 대해서 의학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신병만이 아니라 모든 병을 더러운 귀신의 작용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당들이 주로 엑소시스트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당시에는 의사였습니다. 이런 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을 귀신 현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불가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질병을 의학적으로 분석하고 처방합니다. 정신병자에 대해서 더러운 귀신 운운한 것은 잘못입니다. 거꾸로 이런 이야기가 가리키고 있는 영적인 깊이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근거한 용어지만, 그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이 오늘도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악한 힘들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도 하고, 사회를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있다고 해도 크게 잘못이 아닐 정도로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알 겁니다.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사고에 대해서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귀신 들리지 않고 정신이 말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이런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대학사회,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병원, 영혼을 구제한다는 교회가 귀신 들린 것은 아닐는지요.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의 영보다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 건 아닐는지요. 그런데 사실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력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이런 상황만 본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악령을 향해 잠잠하라고 꾸짖자 물러갔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도 기독교인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결국 예수님에 의해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런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령을 두려워합니다. 분노하고 절망하고, 또는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그 엑수시아, 즉 악령까지 순종할 수밖에 없는 전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믿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그런 분들에게 그걸 극복할 수 있도록 신앙의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는 저 자신을 향한 설득이기도 합니다.

 

종말론적 승리

악령까지 순종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전권을 경험하고, 그 앞에서 놀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악령 축출이라는 사건의 종말론적 성격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의 종말론적 성격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수님의 승리,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입니다. 세상 마지막이 이르러야 진리와 생명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종말론적인 차원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뭔가 속 시원하게 결정되어야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당장 세상이 정의로워져야 하고, 당장 잘 살아야 합니다. 일종의 영적 조급증입니다. 이런데 시달리는 한 악령 축출의 종말론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악령 축출의 종말론적 차원의 현재화입니다. 악령이 축출되는 그 미래를 강렬하게 희망하는 사람이 현재의 삶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서 악령이 지배하지 못하는 일상의 추구입니다. 그것이 곧 수행으로서의 신앙입니다. 일상을 신앙의 길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게 수행입니다. 그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수도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기도와 노동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곧 기도가 됩니다. 저는 요즘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매일묵상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기도이고, 일기이고, 노동입니다. 요즘은 주로 나는 .... 한다.’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걷는다. 나는 배설한다. 나는 듣는다. 나는 숨쉰다. ... 등등입니다. 이런 일상의 존재론적 깊이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악령이 지배하지 못하는 수행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런 삶은 이상일 뿐이지 악령이 지배하는 세상살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세속에서 수도자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생 교회 밥을 먹고 산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과 그 비참하고 비굴한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상황을 다 포괄해서 거기에 딱 맞는 만능의 대답을 저는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알고 경험한 성서와 교회와 신학이 말하는 그 세계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릴 뿐입니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 길을 함께 갈 것이며, 다르다고 생각하면 가지 못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한 순간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은 쫓겨날 때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26절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악령으로부터 벗어날 때는 경련이 일어납니다. 옛날 중국에는 전족(纏足) 풍습이 있었습니다. 세 살이나 다섯 살 여자 아이들의 발을 천으로 감아 발의 성장을 막았습니다. 그걸 중간에 풀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당한 기간에 경련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겁니다. 영적으로 전족을 당하던 사람이 성서가 말하는 세계로 들어가려면 악령이 일으키는 경련과 고통의 순간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워지면 악령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가버나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서 놀랐습니다. 악령이 순종하여 쫓겨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 앞에서 놀라는 경험이 있을까요? 거기서만 우리는 악령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21-28
https://youtu.be/4JEDzV1rq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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