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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알곡과 쭉정이

3:1-12, 대림절 둘째 주일, 2019128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르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가 이 사실을 똑같이 확인해줍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 주제와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 주제는 같습니다. 3:2절은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를 압축한 문장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4:17절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압축한 문장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헬라어로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천국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하늘나라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단어가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1:15)로 나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 나라인데, 마태복음의 하늘나라와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는지 아닌지도 손에 잡히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를 명백한 실재(reality)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를 대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 도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전혀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 주제는 심판입니다.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당신들의 운명은 지금 도끼가 앞에 놓인 나무의 운명과 같다는 겁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무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심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심판의 주체를 예수라고 증언합니다. 자신은 이를 증언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증언은 12절에 나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위 문장의 내용은 당시 일상에서 늘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이런 타작마당이 있었습니다. 탈곡기로 벼 이삭의 낟알을 털어냅니다. 낟알에는 알곡만이 아니라 쭉정이도 있습니다. 쭉정이는 겉모양만 그럴듯하지 내용물은 없어서 바람에 쉽게 날립니다. 농부들은 쭉정이를 한데 모아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13:24절 이하에 이와 비슷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밭에 뿌렸습니다. 그의 원수가 밤에 가라지 씨를 그 밭에 뿌렸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 씨가 함께 자랍니다. 주인은 하인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합니다. 자칫 좋은 씨에서 자라는 곡물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에 곡식과 가라지는 다른 운명에 처합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13:30).

이런 심판에 관한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곡에 해당하는지 쭉정이에 해당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예 무시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반응이 많이 나오겠지요. 알곡과 쭉정이라는 심판 이야기는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문학적인 수사일 뿐이지 우리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깁니다. 특히 요즘 젊은 지성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실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에는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살이가 살벌해서 힘든 마당에 심판 이야기는 왜 해서 더 불편하게 하냐, 하면서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심판 이야기는 예수의 사랑과도 배치되는 듯이 들립니다. 심판 표상을 받아들이든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일단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궁금증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기준일 겁니다. 겉모양이 비슷하기에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옛날 농사지을 때 바람을 이용해서 쭉정이를 골라냈습니다. 쭉정이는 속이 비었기에 바람에 쉽게 날립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속이 빈 쭉정이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바람이 불면 드러납니다. 여기서 바람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시련입니다. 일상의 어려움이나 교회 생활에서의 어려움으로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삶은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사람이 쭉정이에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생명의 능력 앞에서 사람들은 뒷걸음질을 칩니다. 예를 들어 마 19:16절 이하를 따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와서 영생을 얻는 길을 물었습니다. 예수는 십계명을 언급한 뒤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재산이 많은 이유로 예수의 말을 거부한 채 근심하면서 예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속이 빈 쭉정이이기에 예수의 제자가 될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세상의 이치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이상해서 한쪽으로 고정되면 다른 쪽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이 부자 청년은 율법과 재산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두었기에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쭉정이일까요, 알곡일까요.

 

오늘의 심판

알곡과 쭉정이 심판은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알곡이냐 쭉정이냐, 곡간에 들어가냐 불 속으로 들어가냐, 하는 시험을 치르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알곡이 되기를 바랄 겁니다.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알곡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알곡으로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기 화가가 되려는 젊은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중섭, 박수근, 또는 렘브란트나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게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예술가적 영혼도 필요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예술 영혼도 뭉개면서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는 화가가 되지 못합니다. 신앙의 세계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쭉정이의 길을 가냐, 알곡의 길을 가냐, 하는 시험을 받으면서 인생을 사는 중입니다.

지금 여기서 그런 심판과 시험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어떤 사람이 알곡의 길을 가고, 어떤 사람이 쭉정이의 길을 가는 것일까요? 그 구체적인 길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소명을 느껴서 목사의 길을 가거나 선교사의 길을 갈 수도 있겠지요.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세로 살기도 합니다. 저는 어떤 한두 모범적인 예를 들어서 알곡의 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도 사실은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곡이라고 생각했던 삶이 실제로는 쭉정이일 수 있고, 쭉정이라고 생각했던 삶이 실제로는 알곡일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합니다. 의롭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고, 당시 쭉정이로 분류된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곡과 쭉정이를 일일이 판단할 수 없지만, 거기에 어떤 심판이 임하는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정확하게 압니다. 곳간에 들어간 삶이 있고, 불에 태워지는 삶이 있습니다. 곳간과 불은 현재 우리 삶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불을 고통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지옥 불도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그런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으로만 말하면 착한 사람도 고통을 받습니다. 기독교에도 순교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은 곳간과 반대입니다. 곳간은 하나님의 품이라면 불은 하나님을 벗어난 삶입니다. 하나님 없음이 바로 지옥 불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존재의 근거가 부정된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근거가 부정되는 삶은 허무에 떨어집니다. 쭉정이가 불에 탄다는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요즘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읽는 성경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바알 숭배에 빠진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서 왜 하나님을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2:5)라고 비판합니다. 바알은 겉으로만 알곡과 비슷하고 실제로는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데도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대상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바로 이런 헛된 대상을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자신은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아무리 봐도 쭉정이 같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다 쭉정이라고 단정하거나 교회 안에서도 봉사활동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쭉정이라고 간주합니다.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판단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니까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사실은 한 인격체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알곡만도 아니고 쭉정이만도 아닙니다. 일부는 알곡이고 일부는 쭉정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알곡이 많고 어떤 사람은 쭉정이가 많습니다. 알곡만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없고, 거꾸로 완전히 쭉정이만으로 이루어진 사람도 없습니다.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곡이 많지만 어떤 사람은 쭉정이가 터무니없이 많습니다.

 

알곡과 쭉정이의 동시성

예수 그리스도는 알곡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고 했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의 때는 이미 여기에 왔다고 제가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에서 쭉정이가 불에 타고 알곡이 곳간에 들여지는 일이 지금 이미 일어납니다. 속이 빈 쭉정이 같은 삶이 줄어들고 내용이 충만한 알곡과 같은 삶이 확장됩니다. 구도적으로 알곡의 삶을 추구한다면 그는 쭉정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랑한 만한 일이 벌어져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깊은 영혼에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자리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알곡으로 가득한 인생이 우리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이런 인생을 원합니다.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명 충만한 알곡으로서의 삶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정해놓은 로드맵에만 목을 매고 삽니다. 그게 자신을 살리는 길인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생명 충만한 삶이며 무엇이 허무한 삶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의 연륜이 늘면서 기독교에 대한 정보의 양은 늘어나지만, 신앙 자체는 깊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를 안다는 사실과 신앙이 깊어지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심화와 진보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다른 사람을 더 관용으로 대하고, 더 인내하고, 교회의 덕을 위해서 자신의 판단을 접을 줄 압니다. 그게 신앙의 능력입니다. 알곡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를 불에 태운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기에 인간적인 이해타산과 시시비비에서 벗어납니다. 커피 맛의 절정을 아는 사람은 서로 네 커피 맛이 낫다느니 못하다느니 하는 논란에 끼어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생명 충만한 알곡으로서의 삶을 실제로 희망하고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게 무엇인지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알곡과 쭉정이 비유를 비롯한 수많은 심판 이야기를 복음서에서 읽을 때마다 두 가지 마음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입니다. 저의 모든 삶은 마지막 때 심판의 불을 거쳐야 합니다. 저의 설교도 역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목회 전반에 관한 심판도 각오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제가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여 관철한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꼭 도움을 줬어야 할 사람을 저도 모르게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도 될까요? 최근에는 즐겨 먹지 않습니다만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기꺼이 먹었던 돼지국밥과 돼지목살이나 삼겹살로 인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의 식욕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가축이 불행하게 사육되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심판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앞으로 언젠가 우리 미래의 인류는 동물 학대에 가까운 지금의 육식 문화를 극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입니다. 만약 지금의 제 모습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은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선과 교만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 모양만 달라질 뿐이지 그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을 향해서 저런 몰상식한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어, 하고 속으로 무시할 때도 많습니다. 교인들을 선동하는 설교자들을 향해서 본인이 읽으면 얼굴이 붉어질 만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로 인해서 시험 들린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이런 부담을 그대로 안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불로 태워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심판을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제가 다 알지 못하나, 그리고 앞에서 설교한 내용에 여러분이 동의하는지도 모르겠으나,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은행 총재가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하십니다. 알곡은 하나님의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불에 태우실 겁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아 설레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십시오.

마태복음 3:1-12
https://youtu.be/xnabeQw1N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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