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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2005.1.9    
야훼 하나님의 종
사 42:1-4

종의 노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말씀은 2천6백 년 전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종이 임명될 때 불려진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단체이거나 지도자들은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또한 그런 카리스마가 공개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역시 이런 카리스마를 확보한 지도자들을 임명할 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도 국가적으로 대통령 취임식이 거창하게 열리듯이, 또는 교회 안에서 장로 안수식과 목사 안수식이 고유한 카리스마에 의해서 집행되듯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사사기 6장에는 하나님이 기드온을 민족의 지도자로 임명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있으며, 사무엘상 9:15-17절에는 사울의 임명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상 16장에는 다윗의 임명보도가 있는데,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었습니다.
이런 임명식과 오늘 본문의 임명식을 비교해보면 오늘 본문이 왕의 임명식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예언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기는 하지만 공개적이지 않은 반면에 왕들은 여러 증인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 주석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종’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성서기자는 그런 부분을 감추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야훼 하나님의 종을 지칭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한 나라의 정치적 지도자만이 아니라, 또는 종교적 지도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종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명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그 모든 사명을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야훼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민중들을 다스리는 지도자이기 전에 야훼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은 지도자의 실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크고 작은 지도자들은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그들의 일은 사람과의 관계에 앞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는 일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에게 놓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상투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람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일이 잘된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이 붙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기의 일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성서는 바로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의 종은 그의 ‘영’을 받는다고 노래합니다. 야훼의 영을 받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의 영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보통 “성령 받았나요?”라는 말과 비슷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야훼의 영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합니다. 다만 간접적으로만, 소극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실존을 초월하게 만드는 힘에 사로잡히는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의 작은 약점으로 인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장점을 크게 부각시키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더 큰 거룩한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야훼의 선택
야훼의 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야훼 하나님이 그의 종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믿는다고 오늘 성서 기자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우리는 바로 이 구절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훼의 종이 되는 사건은 결정적으로 그 야훼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게 그 하나입니다. 그가 뽑아 세운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가장 단적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선택하지 않고 ‘나’만, 또는 ‘그 사람’만 선택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왜 그 사람에게만 특별한 능력이 있을까? 왜 저 친구만 저렇게 머리가 좋고 잘 생겼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몰디브에서 태어나서 이번 해일로 죽었을까? 왜 중동 지역의 지하에만 원유가 나올까? 이런 질문들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가르침을 논박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뽑아 세웠다는 신앙고백은 우리 앞에 드러난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에서 시작한 것이지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해명하려는 데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절대 긍정을 가리켜 광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앞에서 “노”가 아니라 “예스”로 살아간다는 것과 광신에 빠진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광신은 우리의 모든 이성적인 인식론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태도이지만, 절대 긍정은 그 이성과 합리성과 인식론 너머에 있는 현실을 직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절대 긍정은 곧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를 아무도 광신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앙도 역시 광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그렇게 적합하지는 않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방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바른 해석이며 표현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훼의 영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하나님의 영’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을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을만한 사람은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만한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겠지만 그 영을 받을만한 최소한의 준비가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된 사람들, 곧 그의 영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는 소극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좀 진부한 듯이 들리지만 사실 이건 혁명적인 의식의 전환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사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적인 경향은 늘 자기를 채우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돈을 소유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명예, 또는 신앙마저도 자기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강을 건넌 다음에 배를 버려야 한다는 선승들의 가르침처럼 끊임없이 자기를 비운다는 이 기본 원칙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비움과 영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 자체가 이미 영의 임재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히 비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진공 상태라는 것도 사실은 ‘무’로 채워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재해야만 우리의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이 두 관계, 즉 우리를 비운다는 것과 영이 임한다는 것 사이에는 상호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선후를 따지기보다는 거의 동시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 바로 그 순간에 영이 임하고, 영이 임하는 동시에 바로 우리의 마음이 비워집니다.
아마 이런 설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일 티브이 멜로드라마나 개그 콘서트에만 마음이 가 있던 사람에게는 몇 시간 동안 혼자 묵상하는 고승들의 세계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영적인 상태를 약간 맛볼 수 있는 흔적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영을 경험한 사람은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2절)고 합니다. 그는 자기를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요란스럽게 장광설을 펼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밖에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내면의 세계가 깊고 넓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정의 실천
야훼 하나님의 종에게 부여된 임무를 오늘 본문은 세 구절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c: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3b: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b: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이 세 구절에서 공동되는 단어는 ‘바른 인생길’입니다. 공동번역이 바른 인생길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스파트’의 정확한 뜻을 오늘 우리말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루터는 ‘Recht’(의, 권리)라고 번역했고, ‘진리’라는 번역도 가능하고, ‘참된 종교’라는 번역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베스터만에 의하면 미스파트라는 히브리어의 기본 의미는 ‘법에 의한 판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의를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야말로 예언자들과 신약성서 기자들의 최대 관심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곧 야훼 하나님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세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듯이 ‘미스파트’는 오늘 야훼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모든 힘을 기울여 세워나가야 할 사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의로움의 궁극적인 실체는 종말이 되어야 우리에게 드러나겠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훼 하나님의 종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성령이 곧 생명의 영인 것처럼 그 영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이런 생명의 일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신 이사야 61:1,2절과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7절 말씀은 비슷한 내용입니다. 먼저 이사야 61:1b절 말씀을 보십시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42:7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에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
부러진 갈대, 깜박거리는 등불은 곧 억눌린 자, 찢긴 마음, 포도, 갇힌 자, 소경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특성은 곧 생명의 막다른 골목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길을 회복시켜주는 일이야말로 야훼 하나님의 종이 감당해야 한 귀중한 사명입니다. 아니 이런 일밖에는 더 이상의 일이 없습니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의 창조자이며 생명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생명의 절대적인 위기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없어야만 그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그 생명의 길을 회복시키는 것이 곧 복음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 생명의 막다른 골목에 놓인 사람들이 누굽니까? 불치병에 걸린 사람, 절대빈곤에 들어간 사람, 파산선고자, 외국 노동자 등등,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오늘 그들에게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 ‘미스파트’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물질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감당 불가입니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정의로운 질서를 잡아나가는 게 훨씬 지혜로우며 실효성이 있을 겁니다.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을 고착화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맞서서 교회가 투쟁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훼의 종은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그 일을 감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능력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똑같이 야훼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사야 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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