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1-9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아브라함의 전(前)역사
아브라함이 현재에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온 세계의 조상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구약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신약에 이르기까지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그에 앞서 창 11:26절입니다.
창 7,8장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11:1-9의 바벨탑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창세기 기자는 이어서(10-26) 노아의 첫 아들인 셈의 후손을 열거합니다. 이런 족보의 끝자락에 ‘데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데라의 세 아들이 곧 아브람, 나홀, 하란이었습니다. 이들의 고향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하란’에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서술되기 이전에 벌어진 상황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역사에서 아브라함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달을 신으로 섬기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를 시작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원래의 목표인 가나안가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러 있다가 205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대서사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데라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주제가 바로 앞뒤 컨텍스트 없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역사에 관해서 조금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십시오.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자고 식구들에게 먼저 말했겠지요. 세 아들 중에서 하란은 죽었으니까 접어두고, 나홀은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따라 나섰습니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까지 아브라함이 설득했을지 모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할 이유에 대해 아버지 데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는 긴 여행 중에서 아버지 데라로부터 야훼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지요. 데라는 죽기 전에 아마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이주를 실행하라고 유언을 내렸을지 모릅니다. 아버지 데라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은 이제 그 야훼의 말씀을 새겨들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야훼의 말씀
오늘 본문 1-3절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야훼의 약속입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들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야훼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의 이런 진술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그 야훼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는 왜 나타나지 않으실까요? 고대 시대에는 야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걸까요? 도대체 야훼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이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요즘의 이야기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이 깊은 어떤 가족이 호주로 이민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시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기도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기도하겠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고 가족회의도 열면서 그들은 이민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몇 세대가 흐른 다음에 그 후손들은 처음 이민 계획을 세웠던 그 조상의 생각을 회고하면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조상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민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게서 가나안으로 이민가야 할 이유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는 이런 저런 삶의 과정에서 바로 야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입니다. 물론 성서는 이 아브라함의 탈(脫)갈대아 우르 사건에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 대신 성서는 신이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다는 그 당시의 신화적 서술 방식에 근거해서 흡사 하나님이 직접 입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뜻을 일어주신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그 핵심은 큰 민족, 복, 이름을 떨침, 축복과 저주의 근원 같은 단어에 있습니다. 데라와 아브라함 부자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11:30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으며, 곧 이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 데라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혹은 하란에 머물러 있는 한 가족이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물론 갈대아 우르가 우상숭배의 도시였기 때문에 떠났다는 주장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했겠지만 불임과 큰 민족이 가나안으로 오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생존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후손 번성에서 보았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지금도 인류를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가 지구라는 이 작은 별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후손 번성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의미가 아브라함 시대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오히려 인간의 후손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 지구의 생명을 유지시켜야 할지 모릅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더 구체적으로는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선택된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해주시는지 그 영적인 깊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을 떠나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은 야훼가 분부한대로 ‘길을 떠났’습니다(4).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으니까 사래는 65세였겠지요. 임신할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난 노년기에 이들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조카 롯을 데리고 이삿짐을 꾸렸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니까 당연히 떠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야훼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물론 넓게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게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선택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가변적이고, 훨씬 역동적입니다. 바른 선택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이라는 부르는 이유도 역시 그가 바르게 선택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과 떠나야 할 가능성이 반반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는 표현만 본다면 그가 아무런 고민 없이 무조건 길을 떠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고민이 담겨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서 이미 삶의 기반을 잡았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든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 아버지 데라가 성실할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하란에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더구나 아버지 데라의 무덤이 하란에 있습니다. 비록 자기 자식이 없지만 하란에서 그냥 그대로 머물러 살아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좀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아마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확실했던 삶의 토대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 아브라함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 삶이 최선의 삶이 되는 길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우리 앞에서 주어졌을 뿐이지 어디에도 확실한 표시는 없습니다. 흡사 정확한 답을 모른 채 넷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사지선다’ 형 시험문제를 앞에 둔 학생들과 비슷합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의 선택이 단지 요행수에 의존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삶과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기준에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길을 떠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며, 순종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 기준은 역사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또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데라에게서 야훼 하나님에 관해서, 혹은 그 야훼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을 해석했을 것입니다. 여기 하란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 그는 비록 불확실한 길이었지만 가나안이 바로 자신과 후손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남
오늘 본문에는 유달리 ‘길을 떠남’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의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고, 롯도 함께 떠났으며(4), 모든 재산을 갖고 ‘길을 떠나’(6), 가나안 땅을 ‘거쳐’ 세겜에 이르러 제단을 바친 다음, 다시 그곳을 ‘떠나’(8), 베델과 아이 사이의 산악지대에서 천막을 치고 제단을 바친 다음, 다시 ‘길을 떠나’ 네겝 쪽으로 옮겨갔습니다(9).
성서 텍스트는 간단하게 떠났다, 혹은 옮겨갔다고 표현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결단했습니다. 그에게는 떠남의 선택이 곧 순종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순종에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떠남의 영성’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런 떠남의 영성에서 중요한 사실은 떠남 자체라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향해서 자기 모든 삶을 집중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불확실한 미래라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곧 인류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단초입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가 시작되었다면 이제 둘째 아담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이 가능해졌다는 게 곧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그 약속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순종이 상호적으로 결합하여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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