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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2003년6월8일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방언
아마 내가 경주 감리교회에서 학생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 당시 유행하다시피 성행했던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부흥 강사 목사님은 부흥회 막바지에 방언기도에 대해서 설교하고 모두들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거기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더군요. 중고등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가 원래 평소에도 그런 성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주일공동예배 시에도 담임 목사님이 툭하면 방언으로 기도하곤 했으니까요. 부흥회를 열면 분위기가 고조되기 때문에 덩달아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부흥강사는 방언 기도가 터지지 않은 사람들을 앞으로 불러냈습니 다. 자기가 방언기도를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를 계속해 서 부르짖으라고 하더군요. 대충 10분 정도 할렐루야를 반복한 후에 방언이 터진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방언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학생회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이런 식의 신앙형태가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십일 금식기도, 산기도, 철야기도, 신유, 방언, 입신 등등, 무언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갈구하는 신앙입니다. 요즘은 약간 열기가 식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색깔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노골적인 형태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저변에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좀 잘살아 보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방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언이나 기복적인 생각이 대개는 배타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에 의하면 이런 방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약간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나 다른 세계를 향해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인간적인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오순절 사건
오늘 분문 말씀에는 그 유명한 성령 강림절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방언 현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건일까요?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신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가 승천하신지 열흘 정도 된 때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유월절 절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50일 후가 유대인들의 절기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신자들이 모인 방에 갑자기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고 불길 같은 형상들이 사람들 위에 내렸습니다. 이 순간에 이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곧 이어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국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자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마침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아람어로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모두 제 각기 자기들의 모국어로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 앞에서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편에서 는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웅성거렸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렸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적 경험만 갖고는 쉽게 따라잡기 힘든 이런 현상에 대한 보도를 읽을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두 가지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보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문자(언어)의 겉모습에 매달리는 이런 태도는 성서 기자의 본 의도를 놓치기 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합리주의적인 생각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보도를 무시해 버립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 세상과 역사를 기계적으로 판단함으로써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세계를 간과해버립니다. 흡사 아이들이 부모를 단지 밥을 먹여 주거나 돈을 벌어다 주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비일상적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다 파악해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인식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 보도의 리얼리티를 찾아내는 작업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언어의 리얼리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오늘 이 본문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신화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아 홍수와 같은 재난을 대비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높은 탑을 쌓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높이 드러내고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4절). 이를 보신 야훼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6,7절).
이 본문은 사람들이 말을 좋은 쪽으로 사용하지 않고 무언가 자기들의 뜻을 도모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역사가 바벨탑 사건 이후로 오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만약 오순절 사건이 없었다면 인간은 늘 언어의 혼란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
물론 우리는 늘 대화를 나누면서 뜻이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어를 배우거나 통역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언어의 틈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어를 조금만 깊이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언어를 모국어처럼 습득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일상적 대화를 나누거나 학문적 의견을 나누는 정도의 차원에서는 두 언어의 구사가 가능하지만 언어의 미세한 뉘앙스까지 잡아내야 하는 차원에서는 그게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 십여 년 살다가 7,8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온 친구 목사의 말이 이렇습니다. 대개의 1.5세대 교포 자녀들이 중학교까지는 미국 아이들 못지않게 영어를 잘 하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에세이를 쓰게 되면 거기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아이들은 영어로는 에세이를 잘 쓰겠지만 우리말로는 안 되겠지요. 더구나 시의 세계까지 들어가게 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예컨대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 밝고 가시옵소서."라는 시구를 영어로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한’이라는 단어도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합니다. 영어를 아무리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의 언어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오역이며 반역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언어의 차이가 극복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대화 부재의 사회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드물다고 보아야 합니다. 간혹 티브이에 나오는 대담 프로를 듣다 보면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기보다는 짜증이 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자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말들은 대개 잘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의견이 반성적인 과정을 거쳐서 종합적인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만 거의 일방적으
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논리로 남을 설득하는 것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나중에는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요즘 저는 NEIS 문제가 왜 이렇게도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많습니다. 한쪽에서는 나쁜 점만을, 다른 한쪽에서는 그 당위성만을 강조하고 있지 상대 쪽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결국 양측은 상대방을 극복해야만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힘겨루기에서 이기는 쪽이 쾌재를 부르고 지는 쪽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런 사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늘 경험하는 바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통하는 대화는 거의 없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할 뿐입니다. 말은 서로 한국말을 하는데 부모 따로, 자식 따로, 그야말로 "따로국밥"입니다. 부부사이에도 그렇고 형제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어느 집은 가족끼리 아주 친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비교적 대화를 많이 하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서로 말을 많이 나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 가족들끼리 재미있고 친하게 지낸다는 정도에 머물고 맙니다. 결국 가족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대화는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역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화를 소통시키는 영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오순절에 성령이 바람소리처럼, 불길처럼 초기 신자들에게 임하게 됨으로써 그들이 전혀 새로운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바람소리나 불길이라는 상징은 여기서 별로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격한 충격에 휩싸이게 되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 뒤에 후광이 비친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핵심은 신자들이 성령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능력으로, 또는 자기 언어로 말하는데 듣는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언어로 들리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도대체 성령과 언어와 무슨 연관이 있기에 오늘 사도행전에 이런 일들이 증거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들의 삶에서 사라진 아주 중요한 때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모든 진리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성령이 언어의 소통에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하이덱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대충 이해는 갑니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소유이거나 능력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하이덱거는 인간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고 까지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다만 언어의 말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이덱거가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아주 한정적인 범주 안에 머물렀는데, 언어의 존재론적 성격 규정은 기독교 신학에서 배울만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이미 하나님은 언어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여,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가 있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언어는 무엇을 있게도 만들고 없게도 만드는 존재의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언어를 참된 말이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혼란스러워졌던 언어를 다시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언어를 반드시 가나다라, 에이비시디 같이 고유한 낱말과 그 구성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낱말로 문법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약속입니다. 만약 흰색을 검은색이라는 낱말로 부르기 시작해서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통용이 된다면 흰색은 검은색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참된 언어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비록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이 가능합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드러내주는 능력이 바로 언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에는 선문답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대화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런 언어의 능력은 곧 성령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앞서 대화가 단절된 이유에 대해서 약간 언급했는데, 여기에 바로 근본적인 대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언어가 열어가고 있는 그 존재의 세계를 외면하고 자기에게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하지 않습니다. 언어의 세계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남을 설득하려고만 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서 자기를 열어놓습니다. 그럴 때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보입니다. 이런 열린 시각이 주어지면 그때는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를 능가하는 힘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하이덱거는 그것을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으로서의 복음
오늘 본문은 사도들이 아람어로 설교를 했는데 거기 모였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을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어떤 작용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비록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던 아람어였지만 성령을 경험한 사도들의 태도와 표정에서 이미 어떤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사건 뒤로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또한 바울도 이런 방언 현상을 교회 생활에서 아주 작은 영역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 발성학적인 차원의 방언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 전혀 새로운 언어였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방언입니다. 겉모양의 방언이기보다는 삶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방언입니다. 이런 언어는 그런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끼리 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어떤 사람들이 신자들의 이러한 상태를 보고 "술에 취했다"고 빈정댔습니다. 어딘가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술취한 것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예술가들이 어떤 영감 속에 빠지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는 사회가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사랑의 연대감을 회복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산업발전과 경제도약보다는 자연과 하나가 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희망 말입니다. 이런 언어는 오늘날 방언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
서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 자기들끼리만 비의적인 경험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해석해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특별한 현상으로서 이 언어가 통역되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의 소통을 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003년 6월8일>.



사도행전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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