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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여호와를 힘입고 (삼상 30 : 1 - 15)

여호와를 힘입고 (삼상 30 : 1 - 15) 

▣ 들어가는 말

- 삶의 의미를 찾아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빅터 프랭클은 정신의학 분야에 있어서 제3학파(프로이트-제1학파, 아들러-제2학파)로 불리는 ‘로고테라피’(실존주의 정신의학)를 창시한 위대한 정신의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인간 존재에 도사리고 있는 삼대 비극 요소를 ‘고통’ ‘죽음’ ‘죄’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고통과 죽음, 그리고 죄의식이라는 비극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극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우리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납니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는 곳에서 어떤 이는 악마가 되고, 어떤 이는 너무나 비굴해지기도 하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장면이 연출되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서도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품격을 지키는 이들이 있음을 봅니다. 결국, 누구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자신은 자신이 선택하고 만들어온 자신입니다.

▣ 신의 부름의 의미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모든 이에게 그가 선택받은 왕임을 알리셨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셨다는 것,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의미 있는 삶으로, 진정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것 아닐까요. 인간은 누구나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부름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사명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러한 왕 같은 품격을 가지고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한 근사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야 할 것 같은데, 실은 고난의 연속에 가깝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 역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서 망명을 청합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은 지난번 전쟁에서 블레셋 최고의 장군인 골리앗을 죽여, 자신들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그로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얻은 다윗을 어떻게 받아줄 수 있냐고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다윗은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21:13) 미친 것처럼 연기해서 겨우 죽임을 면합니다.

그래서 다시 유대 땅으로 들어와서 황량한 광야에서 숨어서 지냅니다. 그 소문이 들리자, 형제들과 가족, 그리고 환란을 당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 등이 그에게 찾아와 무리를 이루어(400명 가량)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지요.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군사들을 보내 다윗의 무리를 처단하려고 하지요. 다윗은 또 다시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울을 죽일 기회를 잡기도 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두 번이나 생명을 살려줍니다. 그러나 그래도 사울 왕은 포기하지 않고 다윗을 괴롭힙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다윗은 다시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서 망명을 신청합니다(27장). 아기스의 부하가 되겠다고 거짓 맹세를 한 것이지요.

그러자 아기스는 다윗의 처지와 형편을 아는지라 그를 기꺼이 그의 부하로 삼고 시글락이라고 하는 작은 성을 다윗에게 내려줍니다. 아마 사울 왕이 얼마나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 했는지, 그리고 이제 다윗의 무리가 유대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또한,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을 만큼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문에 밑에 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고, 다윗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바로 이 시글락 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때의 상황입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을 하자, 사울 왕은 더이상 쫓지 않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신하로 거짓 충성을 다합니다. 아말렉족 등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적들을 공격해서 전과를 올리고는 유대 지방을 공격했었다고 거짓 보고를 한 것이지요. 그러자 아기스 왕은 다윗을 완전히 신뢰하게 됩니다. 이제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니 완전히 자신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시작합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데에 참여하기를 명령하지요. 다윗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을 것입니다.

이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는 다윗에게 육체적으로는 보이는 적(사울 왕)에게서 벗어나 조금은 편안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쩔 수 없었고 어려웠다고 하지만, 아무리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적국인 블레셋에 충성을 맹세했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하필이면 적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것은 속내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목숨을 위해서 원수인 아기스에게 거짓이라 하더라도 아양과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처지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들을 보내면서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래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기스를 배반하게 되면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백성인 동족을 향해 칼을 겨눌 수는 없지요.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주셨습니다. 아기스 왕의 장군들이 다윗을 시기한 것이지요. 그와 함께 전쟁에 나갈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에서 다윗은 제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겨우 숨을 돌릴 즈음에 또 다른 너무나 지독스러운 고난이 그의 앞에 나타납니다.

 

 

▣ 어둠의 끝

출정준비를 하고서 갔다가 다행히 아기스에게 출정을 거부당해서 자신의 성으로 돌아옵니다. 아마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을 테지요. 자신의 동족과 블레셋이 일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볼 때, 이번이 이스라엘의 대단한 위기라는 것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이스라엘을 도와 블레셋을 치고 싶지만, 그에겐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표면적으로는 블레셋을 섬기고 있는 처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입니다. 어찌 되었건 불행 중 다행으로 동족과의 전투는 면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시글락으로 돌아왔는데… 눈앞에는 더욱 참혹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아말렉족속이 자신들이 성을 비운 틈을 타서 성을 공격해서 성을 불태우고 아이들과 여인들을 모조리 잡아가 버렸습니다. 온갖 약탈과 살인을 일삼고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모든 것들이 빼앗겼으며,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가족들의 주검들… 겨우 아말렉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의 보고는 끔찍하기만 합니다. 아말렉이 자신들이 성을 비운 틈을 타서 공격해 왔고 시글락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을 노예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어렵사리 가꾸어온 그들의 보금자리 시글락은 이제 죽음의 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의 불만과 원망,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이 울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리고는 부하들은 돌을 들어 다윗을 죽이려 듭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그들은 유대 광야에서부터 다윗에게로 와서 그를 따랐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늘 배고픔을 염려해야 했고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은 없었습니다. 늘 사울의 군대를 피해 다니는 처량한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그 어느 하나도 그들을 따뜻하게 반기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를 곱게 살려서 보냅니다. 그때 사울을 죽이기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가 이제는 동족마저 버리고, 아니 쫓겨나서 이방 땅으로 망명까지 했는데 이제 조금 숨을 돌리려는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고난을 당했으며, 가진 자들에게 억눌리고 빚이 져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쫓겨난 자들이며,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마음에 원한이 가득한 마음이 원통한 자들(22:1-2)이었습니다. 모두 자기 민족에게, 나라에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그 잘난 이스라엘 민족들과 싸워서 시원스럽게 복수라도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조국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했을 뿐 아니라, 조국 땅에서 쫓아내 버렸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오히려 블레셋과 힘을 합해서 그들을 무찔러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시원스럽게 복수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다윗은 아기스의 눈을 피해서 주변의 이스라엘의 정적들을 치면서, 아기스에게는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허위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돕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신을 따르는 부랑자 무리와 그리도 어렵사리,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남의 나라의 땅, 원수의 땅 블레셋으로 가서 그 왕에게 비굴한 충성을 서약하고 얻어낸 작은 성 시글락! 자신들을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살지도 못하게 한 동족을 위해, 블레셋 왕의 눈을 속여가면서 오히려 조국을 돕는 일을 하는 지도자 다윗을 부하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망이 가득합니다.

 

 

▣ 그래도 희망은 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아말렉 군을 뒤쫓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급하고 사정이 긴박했던지 그들은 사력을 다해 추격을 펼칩니다. 점점 군사들은 지쳐가고 도저히 더는 추격이 불가능한 지경에 다다릅니다.

브솔 시내에 이르러서는 더는 추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200명의 군사를 남겨둡니다. 낙오자가 생긴 것이지요. 이러한 추격의 상황에서 2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뒤에 남겨졌다는 말은 그 추격이 얼마나 필사적이었고, 절박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200명을 버려두고서라도 쫓아야만 했던 긴급한 상황입니다. 이번에 뒤쫓지 못하면 가족들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다시금 그나마 견딜만한 400명과 함께 추격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아말렉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점점 더 초조해집니다.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버려진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그는 들판에 버려진 채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기 동족도 아닌 이방인입니다. 병들어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아말렉을 필사적으로 추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력이 없지요. 자칫 잘못하면 가족들과 자기들이 가진 모든 기반을 한꺼번에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입니다. 심지어 추격하고 있는 자신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그 애굽 소년을 살려주려 합니다. 모든 부하가 반대하며 분노에 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한 생명을 불쌍히 보았고 그를 살려냅니다. 아마 부하들은 다윗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런 인간이 무슨 우리들의 지도자라는 말인가? 자신의 부하와 가족들의 생명조차 지켜내지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병들어 죽어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방인 소년을 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제정신인가? 그는 진정 우리들의 대장이 맞는가? 대체 누구의 대장인가?

 

그런데 너무나 뜻밖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그 애굽 소년이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찾고 있는 아말렉 군대의 일행이었던 것입니다. 아말렉 군은 그 소년이 병들어 쓸모없게 되자 그를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결국, 그 노예 소년의 도움으로 다윗과 병사들은 아말렉의 행방을 찾아 그들을 징벌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가족들과 재산, 모든 것들을 찾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됩니다.

 

 

▣ 나가는 말

- 믿음은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이야말로 불신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능력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수많은 절망과 좌절과 고통과 서러움과 눈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알 수 없고, 느껴지지 않고,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지만, 그러해도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절망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 무엇을 기대하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 대해 기대합니다. 신에게 왜 이것을 해주지 않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삶의 의미는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들을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왕으로 부르신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박해받고 원수의 나라에서 미친 짓까지 하면서도, 겨우 목숨을 구걸하면서도, 자신들의 최소한의 삶도 보장이 되지 않고, 가족들마저 빼앗겨 버린 상황에서도, 그는 어찌 버려진 이방의 노예 소년 따위를 외면하지 않았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희망하는 것. 이성과 합리를 넘어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신을 믿는 것.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삶의 의미가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 것. 자신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

“여호와를 힘입고”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옵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 되신 하나님 말입니다. 그 믿음의 길을 함께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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