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t4Wi44uffV0
▣ 들어가는 말
- 지난 주 요약
삼손은 태어나면서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 영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마노아 부부의 신-경험을 뜻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덧붙이자면, 성경은 우리 모두를 향해 ‘너희는 거룩한 나실인’으로 태어난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영웅상’과는 달리, 믿음의 영웅은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만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 신의 사명을 품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성경의 영웅 이야기는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격도 능력도 거룩함도 없는 인간을 위대한 삶으로 이끄는 신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위대하고 놀라운 신의 섭리에 인간은, 마노아 부부는 그분을 ‘기묘자’로 경험한 것입니다.
- 인간 삶의 완성
인간의 탄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삶이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삶은 어떤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세상에 감히 누가 삶이 의미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 말에 감추어진 뜻을 알기는 하는 걸까. 철딱서니가 없는 것인지, 오만하리만큼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물론, 맹목적으로 삶의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라 단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향해 나실인으로 태어났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실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성경의 선언은, 그 삶은 목적과 의미, 다시 말해서 사명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나실인’은 삼손이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상징하는 그림자입니다. 우리 모두 ‘나실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 각각은 자신만의 사명이 있고, 이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놀라운 뜻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깨달아야 하고, 그 사명을 인식한 자의 삶은, 즉 나실인의 삶은 일반적인 삶의 양태와는 다른 구별되는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 구별되는 나실인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않는 것, 머리를 깎지 않는 것,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나실인의 규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어떤 규정을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 사명을 인식한 인간의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을 인식한 인간이 그저 이 세계의 세속성에 빠져서 살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이 세계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돌아온 탕아의 삶이 그 전과 같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마지막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게 되면, 마침내 그를 통해 이루어지기 원하는 신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기완성, 구원, 온전한 자유 등이 성취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분열된 자아가 아닌, 온전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과 삶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삶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경탄하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먼저 인간은 자신의 사명을 인식해야 하고 그 사명을 인식했다면, 둘째 그 사명에 적합한 삶의 방식대로 살아내야 하고, 끝으로 그런 삶을 살 때 마침내 그가 바라는 완성, 혹은 사명의 완수, 구원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삶의 완전성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서에 따라 좀 더 논의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 사명의 인식
- 대적자의 세계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지배해온 블레셋은 ‘촌에 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란 말도 블레셋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들은 원래 고향은 지중해 그레데 섬이었습니다. 섬나라 사람들의 특성으로 보이는, 육지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지중해 섬에서 나와 애굽을 침략하려다 실패하고(라암셋 3세, B.C. 1205~1174), 돌아오는 길에 욥바를 중심으로 한 해변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숙적이 됩니다. 그러다가 이 블레셋이 삼손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삿14:4) 그들은 마침내 민족의 숙원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하지요.(삿13:1) 저들은 그 이후에도 사무엘 시대(삼상5:1), 사울 왕 시대(삼상14:1)를 거쳐 다윗 시대(삼하8:1)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성경에서 블레셋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자, 영적 숙적,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삿14:4)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삼손 이야기에서 블레셋은 물리적인 대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사사기의 세계, 제멋대로의 세계에서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겪게 되는가를 설명해주는 물리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빠져 있는 삶, 존재 물음을 상실한 삶 속에서 인간은 과연 사명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을까요.
- 사명은 무엇인가?
사명을 인식하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은 사명을 지나치게 거창한 무엇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명은 요셉이나 다윗처럼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 삼손처럼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것. 모세처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 베드로나 스데반과 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신앙을 위해 순교하는 것 등과 같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은 너무 평범하고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고, 대단히 뛰어난 재능이나 능력이 있지도 않고, 무엇하나 비범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어쩌라는 말이냐.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명을 인식하는 특별한 이야기들. 타지 않는 불붙은 나무,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 굶주린 사자굴, 바다가 갈라지고, 끝이 없이 흘러나오는 기름병… 그 수많은 기적은 왜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을까. 뭔가 아주 특별한 일이 내게도 일어난다면, 나도 사명을 깨달을 텐데… 그러나 그런 특별한 일도 내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러니 의미와 목적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즐기며 살다 가면 그만이라 여기는 것이 무리는 아니지요. 인간이 자기 삶의 의미, 목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은 어떻게 인간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걸까요.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태어남이, 존재함이 곧 사명이라고 말입니다. 너희는 이미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고. 그래서 ‘태어나면서 나실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삶의 세속성에 빠져 있어 생명을, 존재를 감탄하고 찬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존재함이 기적이 아닐 수 없는데, 살아있음이 어떤 것보다 찬란한 것인데, “작은 태양” “해/빛”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빛으로 태어났으나, 어둠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치 고귀한 왕자로 태어났는데, 환경으로 인해 스스로 거지라고 믿으며 거지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명은 나의 밖에 있는 어떤 대단하고 놀라운 것을 이루어 내는 게 아닙니다. 이미 내가 가진, 내 안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지요. 사명은 거창하고 굉장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책임이나 짐이 아닙니다. 신은 우리를 노예로 부르지 않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고 그 가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가장 위대하고 어려운 사명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모두에게 부과된 신성한 의무입니다. 자신이 되어야 하는 사명,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직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하는 거룩한 미션(mission) 입니다.
▣ 나실인의 삶
- 믿음은 삶의 방식이다
사명을 인식했다면, 이제 사명을 인식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지켜야 하지요.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용어로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정서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명을 인식한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명을 인식한 이, 신의 형상을 지닌 이, 자신이 거지가 아니라 왕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돌아온 탕아가 살아가는 방식인 겁니다. 그저 종교적인 생활이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지요.
- 삼손의 저항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낙점받았습니다. 결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에게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에게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자신이 작은 태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철이 들자마자,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14:1)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아마 그는 부모가 강요하는 나실인의 삶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도, 여호와를 섬기는 삶도… 소위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의 강요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잘 섬겨야 한다.’ ‘너는 나실인이다.’ ‘너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절대로 술 먹지 마라’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마라’ ‘너는 블레셋 사람들의 유행을 따르지 마라’ ‘머리도 깎지 마라’ ‘시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뭐가 그리도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요. 부모의 잔소리는 끝도 없습니다. 머리 스타일도 정말 구립니다. 부끄러워 밖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온몸을 감싸고 다니는 유대 여인들도 정말 어처구니없습니다. 그에 비해 블레셋의 여인들은 너무나 세련되고 매력적입니다. 마음껏 술도 먹고 같이 어울리고 싶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쁘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가 그리도 위대한 신이라면, 왜 우리는 블레셋에 지배를 받으며 수탈을 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어른들은 모릅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옛날 이야기하지 말고 바뀐 시대에 빠르게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니 철모르는 어릴 때야 부모의 강압적인 가르침에 어쩔 수 없이 따랐지만, 이젠 성인입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살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의 잔소리를 뿌리치고 내 맘에 드는 섹시하고 매력적인 블레셋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 합니다.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16:1) 그는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향해 귀가 닳도록 전해진 사명은 아직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무겁고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입니다. 마노아 부부가 그리도 일렀던 삶과는 완전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모의 신앙을 철저히 반대했는지. 반항했는지. 제멋대로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독스럽게 자신의 사명, 자신의 신앙, 하나님을 부인하며 거부했는지요. 달리 표현해보자면, 그는 철저하게 믿음이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어둠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유롭다 믿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자유를 누리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 사명의 완수
- 그의 깨달음
그러나 그는 민족에게 배신당합니다.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민족의 지도자이지만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동족들은,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삿15:11) 함께 블레셋에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지도자를 블레셋 군대에 내어줍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에게도 배신당합니다.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삿16:4) 전에 만났던 여인들과는 다릅니다. 들릴라에게만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만 보아도, 그의 사랑이 진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다 주었건만 자신을 팔아넘깁니다.
자랑하던 머리카락마저 잘려나가고, 두 눈도 뽑힘을 당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맙니다. 세상의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자부심과 엄청난 육체적인 힘도 사라져버립니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를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쇠사슬에 매여 차갑고 더러운 옥에 갇혀 채찍에 맞으며, 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굶주린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매일매일 거대한 맷돌을 돌립니다. 깊은 절망과 어두움뿐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삶이 이리도 깊은 어둠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지하의 옥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터이지요. 깊은 후회와 절망과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참회의 눈물을 쏟았을까요. 그제야 부모의 말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는지, 신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 얼마나 엄중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신이 그 아름다운 삶과 사명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렸는지. 부모와 민족과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비로소 조금씩 깨닫습니다. 잘못을 인식할 때마다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쏟아냅니다.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는,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소용없는 지독한 심연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납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리는,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주님, 한 번만…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죄를 씻을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면 족합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저의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이룰 수만 있다면, 저로 인해 거룩한 당신의 뜻이 망쳐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부모님께, 민족에게, 하나님께 사죄할 수만 있다면…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한 번만…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삿16:28)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모든 것을 바쳐 한순간만이라도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겠다 다짐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다시 그에게 임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정말 온갖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신을 믿습니다. 그분께 그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의 영혼을 받아줍니다. 그는 죽음으로 그의 사명을 이루어 냅니다.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이룹니다. 진정한 빛의 삶을 성취합니다.
- 영웅은 없다.
인간은 유일하게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철학적으로 ‘존재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이지요. 본문의 성경적으로 말해보자면, 사명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덧없는 삶과 세속적 세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이 있음을 믿고 살 수 있는 존재. 정말이지 인간은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깊은 절망을 경험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고뇌하고 갈등하고 아파하고 절망하는 존재. 그냥 대충 살면 될 것을. 왜 그리도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그리도 간절히 갈망하는 존재인가요. 고뇌하고 방황하고 흔들릴 수 있는 존재.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삿13:24,25) 인간을 다르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입니다. 우리는(삼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삿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삿14:19)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14:4)
분명 유일하게 사명을 인식하고, 사명을 살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가진 한계성으로 그 사명을 살 수 없는 불행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삼손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사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끊임없이 반항하고 잘못된 길로 달려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한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표현하는 “죄인”이라는 표현입니다. 거룩하고 찬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빛으로 태어났으나, 그 사명을 살지 못하는,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을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영. 그의 한 없는 사랑.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언제나 그 이름이 저와 여러분의 심장에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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