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18년 7월1일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10.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연보의 요청
우리는 오늘 제3독서로 고후 8:7-15절을 읽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특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충분하게 모른다고 해도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의 영혼이 자극받곤 합니다. 첫째는 이 글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설교를 2천년 후의 어떤 사람이 읽는다고 상상해보면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 겁니다. 둘째는 바울의 편지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입니다. 교회생활에서 직접 부딪치는 일상에 관한 것입니다. 이 편지를 며칠 전에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연보(捐補)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 대목인 고후 8:1절 이하에서 오늘 이야기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게도냐는 일반 명칭으로 마케도니아라고 합니다. 그리스의 북쪽이고, 알바니아의 동쪽에 자리한 나라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와 그리스 지역에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 관계를 맺으면서 영적으로 ‘케어’해주고 있었습니다. 고후 8:2절에 따르면 마게도냐 교회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냈으며, 3절에 따르면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원하여’ 이 일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보는 구제헌금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지원 업무에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후 50년 어간의 일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재정으로 큰 어려움에 떨어졌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모금된 돈을 직접 들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의 다른 구절에도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을 돕는 연보활동을 마게도냐 교회보다 먼저 시작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지지부진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다시 힘을 내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지금 말을 건네는 중입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연보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생겼는데도 독촉하면 그들이 시험에 걸릴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바울이 자기 이름으로 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지만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7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교회는 초기 교회 중에서 가장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바울 개인에게도 각별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합하면 29장이나 됩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길고, 특히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는 이런 정도의 분량의 편지가 이것 말고 없습니다. 더구나 이 편지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 특별히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믿음도 좋았고,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정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선교 팀을 이루고 있던 바울 일행과의 신뢰관계도 남달랐습니다. 그러니 모금 사업에서도 당연히 남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보의 정신
바울은 연보를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대가 없이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이 ‘기브앤드테이크’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이런 방식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사랑할수록 삶이 풍성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은 상투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가 있습니다.
연보가 왜 은혜인지를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교리를 머리로는 알고 있기는 하나 실제적으로는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이걸 실감하지 못하면 다른 신앙도 다 허물어집니다. 이것 없이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 은혜로 인식하고 경험했으며, 실제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여기서 부요하게 된다거나 풍성하게 된다는 말은 단순히 돈이 많거나 사업에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건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겁니다. 한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생명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예를 들더라고 이해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공회사 사장 가족이 몇 년 동안 여론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가까운 직원들을 종 부리듯이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태도를 그들이 보였습니다. 생명을 오해하는 데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는 있으나 우리에게도 그럴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식하고 파렴치한 방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삶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야합니다. 오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세월과 더불어서 점점 더 생명으로부터 소외당할 것입니다. 소외당하면 삶은 겉모양과 상관없이 위축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짐으로써 우리는 풍요로워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여전히 실감이 가지 않으신지요? 제가 나이가 들면서 설교도 친절해졌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서, 오늘도 좀더 친절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각자 다르겠지만, 정말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제가 테니스를 즐기니까 스위스 테니스 선수인 페더러에게서 레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행복하겠지요. 아니면 제 학위논문의 대상이었던 판넨베르크 선생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말을 직접 듣는 순간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일 겁니다.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도 이럴진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영혼이 절정의 풍요로움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테니스를 모르는 사람은 페더러와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별로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보물을 보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가 왜 은혜로운 행위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본질을 마음의 중심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타인에게 자기를 나눠주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동물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들도 먹을 게 생기면 우선 자신이 먹고 남은 것을 자식에게 줍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지구에서 생존했으니 그걸 인간 입장에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휴머니즘에 근거해서 연보, 즉 구제에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들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재산을 희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은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난민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설왕설래가 우리나라에서도 많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진 그들을 내치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교회가 제주도에 있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 가족도 난민인 적이 있습니다. 예수가 신생아였을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해 위험을 느끼고 애굽으로 피신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교회 구제선교부가 이런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면 합니다. 현재도 우리교회의 전체 재정 크기로 보면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은혜의 깊이는 무한정이니 진도를 더 가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연보의 본질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교회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옳다하더라도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반론은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돕냐?’ 하는 겁니다. 또는 돕는다고 해서 그들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13절에 따르면 고린도교회에서 나온 반론은 도움을 받는 교회의 상황이 좋아지고 도움을 준 고린도교회의 상황만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라고 해서 늘 재정적으로 넉넉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 불안을 바울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아주 담백하고 직접적입니다. 상부상조의 원리입니다. 거시 경제도 이런 원리에 기초합니다. 현재는 예루살렘교회가 재난을 당했으니까 고린도교회가 돕고, 나중에 고린도교회가 힘들어지면 예루살렘교회가 도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좋은 합리적인 대안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바울은 연보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도 역시 유익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나중에 도와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당장 바꾸기는 힘듭니다. 북한의 핵 폐기 약속을 어떻게 믿느냐고 의심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북한과의 경계협력이나 상부상조를 ‘퍼주기’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계속 의심하고 배척하면서 각자도생하면 그만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겠지요.
바울은 15절에서 구약의 한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만나 사건입니다. 고대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들판에서 만나를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 숫자에 맞춰서 적당한 양의 만나를 거둬들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정한 양 이상을 거둬들이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악천후가 되거나 사람이 아프면 만나를 거둬들일 수 없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이나 적게 거둔 사람이나 나중에 확인해보면 양이 다 똑같았다고 합니다. 먹고 남긴 만나는 다음날 벌레가 생겨서 못 먹게 된 것입니다.
만나 이야기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합니다. 보통은 하루에 세 번 먹습니다. 두 번 먹어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남겨두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모자라지 아니하였다.’(고후 8:15). 출 16:18절의 인용입니다. 이게 인생의 진면목입니다. 부자로 산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으로 산 사람이나 최종 결산은 똑같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요. 차이가 크다고 말입니다. 더 엄격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죽는 순간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재정적으로 남보다 더 넉넉하게 살고 싶고, 죽을 때 남는 것은 자식에게 넘겨주면 되니까 가능한 재산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생각으로 나누는 삶의 한 형식인 연보에 인색하면 삶이 왜곡되고 위축됩니다. 은혜 없이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만 연보를 넉넉하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봐야 세상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니, 바울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연보를 하라는 설교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부담만 준다는 뜻입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세상은 늘 그런 모습이고, 또한 연보에 적극 참여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너무 팍팍합니다. 만약 최소생활비를 국가에서 책임져준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수입이 없는 사람들에게 개인당 월 100만원을 맞춰주는 방식입니다. 이런 복지 문제는 제가 관여하기에는 너무 복잡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그리고 세상이 변하든 않든 상관없이 기독교인은 삶과 그 과정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도 손해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살리는 힘인데, 우리가 은혜로 산다고 해서 어떻게 손해가 나겠습니까. 저금통장의 잔액이 줄어드는 게 손해일까요, 아니면 영혼의 평화를 모르면서 사는 게 손해일까요?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연보를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지만 세상과 인생살이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재정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은 연보에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형편에 따라서 적게 바치는 것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상품을 팔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연보 행위가 바로 교회의 헌금 행위와도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연보와 헌금, 이것은 분명히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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