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바울과 빌립보 교회
바울의 편지인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감옥이 로마인지 가이사랴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는 것은 그런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든지, 아니면 시간의 여유가 주어졌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우리가 이 편지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편지의 저자인 바울과 수신인들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바울은 지금 신학대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거나 아니면 어떤 교회에 초청받아서 청중 일반을 향해 설교하는 게 아니라 빌립보 교우들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그 내막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의 압력과 안디옥에서 함께 활동하던 바나바와의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어느 날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들에게 와 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것으로 믿고 지금의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순간입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빌립보입니다. 그곳에서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출현합니다. 자색 옷감 장수인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입니다.
소아시아에서 야반도주하듯이 그리스로 넘어온 바울이 빌립보 공동체가 설립되는 걸 보고 얼마나 감격했을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일 뿐만 아니라 바울과의 매우 돈독한 관계를 꾸준하게 맺었다는 점에서 바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 예컨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설립했지만 여러 파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많은 교회에서 사도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만이 거의 유일하게 바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4:15,16절 말씀을 보면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립비의 교우 여러분, 아시다시피 내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 지방을 떠날 때에 나와 주고받는 관계를 맺은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데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한두 번 보내주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의 깊은 우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신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해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에 의하면 빌립보 교우들이 바울의 복음 전도에 협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우들을 통해서 이렇게 선하고 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6절) 그는 그 사실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에게 나타난 귀한 일들은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지금도 계속하시며, 장차 완성하신다는 겁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맺은 관계는 단순히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과 연루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는 사람이 더욱 그리운 법입니다. 특히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속마음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통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 절절한 마음을 담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가장 힘들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그 대상이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 있고, 아내나 남편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우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는 편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분별력
바울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무언가를 기원하듯이 지금 보고 싶은 빌립보 교우들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분별력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사람들은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식과 분별력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과 분별력은 단지 가방끈이 길어야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마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일지 모릅니다.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감정적으로 휩쓸리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것은 광신이겠지요.
사랑의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바울의 주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당면한 문제는 주로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에 강력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사람들을 경건하게 만들고 도덕적으로 만드는 시금석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따르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면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가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의 복음과 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예컨대 십계명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걸 신앙의 본질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율법주의자들은 “이것도 저것도”의 태도라고 한다면, 바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이 더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차원에 연관입니다. 애국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애국심은 국가주의, 쇼비니즘으로 떨어집니다. 정치인들은 민중들의 맹목적인 국가주의를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효도 문제도 비슷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일은 필요합니다. 어릴 때 보호를 받았듯이 부모가 늙어서 살아갈 힘을 잃었을 때 마땅히 도와야겠지요. 그러나 거기에도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맹목적인 효도가 모두의 삶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분별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중들의 광신을 유도하고 그걸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식의 광신과 열광주의는 사랑을 심화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라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권면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랑이 풍부해질 때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10a)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분별력으로 사랑이 풍부해질 수 있으며, 거꾸로 사랑이 풍부해져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분별력과 사랑은 상호 순환적인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러분 중에서 바울의 이런 가르침을 순전히 종교적인 것으로만, 그래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오해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바울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순식간에 요술을 부리듯이 사라진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사랑과 이성의 관계를, 믿음과 인식의 관계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풍부해지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도 오해가 따르겠군요.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 악한 영과 성령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몸에 귀신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다고 까지 억지 주장을 폅니다. 사람의 의식이 매우 심층적이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경험을, 예컨대 전생을 보았다는 주장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기준을 그런 것에 놓다가는 이 세상은 온통 사이비 교주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주술이나 심리작용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식론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음악을 실제로 사랑하면 그 사람은 음악의 본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이 참된 음악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거꾸로 음악을 분별할 수 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과 찬양
오늘 설교 제목은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입니다. 제가 이 제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을 설교하고 있는 건 같지요? 설교를 무한정 길게 할 수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더 이상 혼란스럽게 생각하기 전에 이제라도 제목과 연결해서 정리해야겠군요. 제가 말씀드린 내용과 제목과는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사랑의 분별력으로 사랑이 풍부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입니다. 사랑이 풍부해져서 무엇이 가장 옳은 것인지 분별하는 삶이 곧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가벼운 복음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걸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의 표현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과 감수성에 머물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훨씬 근원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삶, 생명을 이해하는 것만큼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런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바울의 진술을 조금 더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순결한 사람이란 이 세상의 삶과 아무 상관없이 수도원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다는 것은 곧 인간 삶에서 무엇이 본질인지를 분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면 그런 분별력이 깊어지며,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을, 즉 모든 진리가 완전히 나타날 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르는데, 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진리를 알겠습니까?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의 독단에 빠져버리는 게 문제겠지요. 신앙 문제에서도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찾아보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믿겠다거나 자기만족에 빠져버리는 게 문제겠지요.
앞에서 바울은 사랑이 풍성해지면 옳은 걸 분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의 힘에 휩싸여야 한다는 말인데, 그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 풍부해지는 길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그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랑이 풍부해지는 건 아닙니다. 물론 이게 쉬운 말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어서 옳은 것을 분간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묻혀 있을 때는 자기의 몸에서 꽃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챌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지금 전혀 눈치 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꽃이 피듯이 주님은 오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순결한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 풍성해져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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