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찬송
엡 1:3-14, 성탄절 후 둘째 주일, 2021년 1월3일
터키 이즈미르주(州)의 에페소스(에베소)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적이 많습니다. 그 유적이 201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 번 방문했습니다. 한번은 2차 선교 여행 끝에 아주 짧게 방문했고(행 18:19~20), 다른 한 번은 3차 선교 여행 초반에 2년 동안(행 19:10) 머물렀습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아데미’ 숭배와 관련한 사업가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선교로 인해서 자신들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동이 끝난 뒤에 바울은 에베소를 결국은 떠났습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바울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 에베소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여기에는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시원적이고 원형적인 형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찬송
엡 1:3~14절은 당시 초기 기독교가 널리 불렀던 일종의 찬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시편과 비슷합니다. 이게 에베소서의 특징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는 많이 거론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주로 찬양 시 형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찬송’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3절에서 보듯이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해서 14절의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삶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갔을 때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경험했기에 영광-찬송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3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위 구절에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경험한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찾은 겁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도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엔 크리스토)에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하늘의 영적인 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복에 관한 내용은 4절 이하에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나옵니다. 여러 내용 중에서 저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한 가지에 나머지 내용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5절을 보실까요?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원칙적으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유대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짚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엔)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했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그대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어느 쪽이 옳은가요? 둘 다 옳을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내세우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혈통적인 차원으로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차원으로서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 살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칭찬받을만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태도는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절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당시 유대교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형식에 매달리면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위선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안식일 논쟁과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종교재판에 부쳐서 신성모독 죄를 선고했고, 결국은 로마 사법 당국에 고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제 유대교가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성전이나 율법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인 터부(taboo)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와 비교될만한 한 가지 단적인 예를 들면 십일조 헌금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잘 바치면 온갖 복을 다 받는다고 믿습니다. 수입에서 십 분의 일을 자기가 아니라 교회 활동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라면 나쁠 게 없습니다. 오히려 권장할만합니다. 일종의 형식인 십일조 제도가 터부가 되어 율법주의나 주술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터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얽매이게 합니다. 생명이 위축되는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교의 종교적 터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해방감이 충만했기에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상에서도 즐거운 일이 있으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죄와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전체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졌으니,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분과 성전 종교의식과 율법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주시어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3절과 6절과 12절과 14절에 반복해서 영광-찬송을 올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6절만 읽어보겠습니다. 5절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벅찬 느낌이 전달될 겁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은혜의 영광을 찬송”한다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신앙적으로 옳은 가르침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말이 영광-찬송이지 실제의 삶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일희일비, 좌고우면, 좌불안석으로 살아갑니다. 좋을 때는 너무 좋고, 나쁠 때는 너무 나쁜 생각에 파묻힙니다. 현대인은 대체로 조울증을 앓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인과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현재 정부의 정책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주 성급하게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정책은 늘 양면성이 있습니다. 전체 방향이 괜찮으면 그 정책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손님이 밀려 있는 중국집에 가서 자기가 시킨 요리가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쏟아내는 증상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대책만 해도 그렇습니다. 초기에 중국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비판하고, 조금 후에는 마스크 정책과 재난 지원금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트집 잡듯이 열을 올렸습니다. 이제는 백신 문제로 또 불평합니다. 우리나라의 방역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K-방역”이라고 다 인정합니다. 백신 문제도 로드맵에 따라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방역 실패라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와의 전시 상황이니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이런 소란에 오히려 앞장섭니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소란과 소동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제 눈에는 사회적인 조울증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니 기독교인들도 영광-찬송의 삶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 찬송이 나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찬송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끼십니까? 그 답은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압니다. 자신이 갈망하던 일이 이뤄지는 순간에 우리는 노래하고 싶어집니다. 결혼, 직장, 아이, 집, 여행, 건강 등등에서 이를 경험합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프로 축구나 프로 야구단이 아슬아슬하게 우승하면 정말 짜릿할 겁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은 늘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고, 모두가 건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늘 승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 다 그렇지 신앙인이라고 해서 별다른 게 있냐,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저도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행복 세일즈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광-찬송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서 절대적인 기쁨의 유일한 토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기는 자신이 없으니까요. 쓸데없는 생각에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지금 살아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사는 저도 이런 실정이니 치열한 생존경쟁의 원리로 작동하는 세속 사회에서 사는 여러분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절대 경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광-찬송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차이가 없다면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 차이를 이미 아는 사람은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찬송의 삶을 느끼면서 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차이가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극단적인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사하라 사막 단체 여행을 갔습니다. 자유 시간에 혼자 사막에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모래폭풍이 불어서 10m 앞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사막에서 며칠을 헤맸습니다. 기운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취업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식의 결혼 준비나 일주일 뒤에 나올 건강종합진단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구조대가 자기를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합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던 순간에 구조대가 여러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이 바로 영광-찬송입니다. 다른 그 어떤 잡념도 일절 개입하지 않는 절대 경험입니다. 이런 절대 경험이 아니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경우와는 달리 모든 게 쾌적하고 넉넉하고 안전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경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게 삶의 딜레마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 불편 없이, 더 나아가서 소비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단체 여행을 가서 호텔에서만 머무는 행태입니다. 삶이 늘 그렇고 그렇습니다. 기껏 해봐야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안락할 뿐입니다. 삶의 절대적인 차원과 점점 더 높은 담을 쌓기에 영광-찬송이라는 오늘 본문의 고백이 멀리 느껴지는 겁니다. 영광-찬송은 몰라도 되니 크게 고생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만 조금 비우면 대충 그럴듯한 인생은 누구나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불교 용어에 ‘백척간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척간두는 아무 의지할 대상이 없는 극한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예로 든 길잃은 사막과 같습니다. 겉으로 멀쩡해도 사실은 우리의 삶 자체가 백척간두이고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입니다. 왜 그런지를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릴 테니 저의 설명이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 보십시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에서 너무나 외로운 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득하고 아찔합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분 개인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입니다. 우주에서 외로운 지구처럼 여러분도 모두 절대적으로 혼자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가족과도 결국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혼자 죽어야 하듯이 살아있을 때 모두 실존적으로 혼자입니다. 말 그대로 백척간두입니다. 아주 명백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그런 궁극적인 실존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천하태평으로 삽니다. 그럴 여유가 ‘1’도 없는데 말입니다. 무엇인가에 바빠서 그럴까요? 그걸 고민해봐야 아무 해결책이 없기 때문일까요?
역설적이게도 그 고립무원의 자리를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오늘 에베소서 본문이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그 영광-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설마 그럴까, 하고 믿기 힘드신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에서 구조대를 만난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옆 사람이 말려도 영혼의 깊이에서 찬송하고 싶어서 못 견딜 것입니다. 2021년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에게 더 풍성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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