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2
신학계에서는 가끔 예수와 바울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예수 세미나로 통칭되는 일단의 신학운동은 바울에 의해서 예수의 순수 복음이 헬라화 되었으니까 가능한대로 바울의 이런 색채를 제거하고 원래의 복음운동으로 돌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대의 구원사건은 그것 자체로 완료되어버리는 게 아니라 역사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바울에 의한 예수 복음의 해석은 기독교가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만이 아니라 다른 서신들의 저자들도 그랬고, 예수를 로고스이며 빛으로 설명하고 있는 요한복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왜 구원자인지 설명하려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헬라철학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메시야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명제가 원래의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가 왜 메시야인가, 구원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설명하는 게 해석인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두 사태의 경계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원래의 고유한 복음과 그것을 전해듣는 이들이 알아듣도록 풀어내는 해석 사이에 말입니다.
이 사태는 오늘도 여전히 타당합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신자들일수록 이 단언적 원래의 명제에 충실하며,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신자들일수록 해석학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 장로교 합동이 전자에 속하며 민중신학으로 대변되는 기장이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두 입장을 반드시 보수다, 진보다 해서 칼로 두부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믿는 바를 설명할 책임이 있으며,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대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현장에서 이런 두입장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잣대는 영적이냐, 이성적이냐에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그것에 대한 해명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반대로 이성적인 사람들은 교회의 영성을 열광주의자들이나 무식한 사람들의 신앙형태로 생각합니다. 아마 조금이라고 생각이 깊은 분들은 이 영성과 이성이 그렇게 반대되는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겠습니다만, 교회 현실에서는 대립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과연 영적인 게 무엇이며, 이성적인 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깊은 차원에서 이런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몸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소마와 사르크스, 두 개입니다. 소마는 말 그대로 이렇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몸이지만, 사르크스는 살덩어리로서의 몸을 뜻합니다. 오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소마입니다. 그러니까 통전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희생제물이 되게 해야한다는 말이 됩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이나 소는 비록 겉모양은 그대로이지만 제단에 바쳐진 순간에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흡사 우리가 지금 성찬예식 때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처럼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전체 삶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단지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과 연결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점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쉽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자존심도 살리고 명예심도 얻을 수 있고, 어떤 종교적인 위안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는 일은 온전히 드려지지 않는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분만 드리는 게 아니라 전체를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철저합니다. 거의 혁명적인 의식의 변화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은 아마 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늘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 원래의 의미를 충분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신앙생활에, 교회생활에 열심인 신자들은, 그중에서도 더욱 신앙적인 신자들은 이렇게 희생제물처럼 살아간다는 자세로 세상 일은 좀 접어두고 신앙적인 일에, 교회의 일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헤어지면 전도하자는 구호가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좋은 일들입니다.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게 나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수한 열정의 신앙이 무턱대고 믿고 노력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좀더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덧붙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게 바로 "영적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삶과 예배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놀랍지요? 삶이 예배이며, 예배가 바로 삶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실을 참으로 하나로 생각하시나요? 대개는 삶과 예배가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지나치게 성속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은 속되고 교회는 거룩하다고, 주일을 평일과 구별된 거룩한 날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비록 편의상 이런 구분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종교적 상징으로서 이런 구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세상도 거룩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교회도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만 거룩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이 거룩한 시간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삶과 예배를 실제로 하나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비주의자라고 보릅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에크하르트 등,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자기의 삶을 예배로 생각했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접어두고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목사나 선교사나 신학자나 수도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해야만 삶과 예배가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예배"라는 단어를 자세하게 보십시오.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합니다. 루터번역은 "vern 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로기켄 라트레이안"으로 되어 있는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rational, 다른 하나는 spiritual입니다. 개역성경은 로기코스를 영적인 것으로, 루터는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진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은 그 중간의 입장 같군요. 아마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는 이성과 영성을 동일한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성과 영성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일반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간혹 교회 안에서 "저 사람은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야" 하면 무언가 이성적인 생각을 뛰어넘어서 비이성적으로, 비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산(山)기도 많이 다니고 성경을 많이 읽거나 베껴쓰고, 말투에서도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영적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영성"이 화두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극복하고 무언가 신비로운 가치를 회복하자는 뜻이겠지요.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물질 중심적이고 경쟁위주이고 인본주의적이니까 이런 것을 뛰어넘는 신앙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영성이 이성과 합리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는 것 같아서 약간 염려스럽습니다. 성서공부에서도 신자들은 성서에 있는 사건을 무조건 믿어야만 좋은 신앙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엉뚱한 이야기라도 말입니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오늘의 시점에서는 아주 명백한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도 그것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믿어야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억지 주장이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면 교회는 광신자 집단이나 혹세무민 집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작년 12월14일 오후 5시에 대구백화점 앞에서 열린 효순, 미선양 사망사건 촛불추모집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 바로 그 옆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른 어떤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예수 믿으라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참다 못해서 좀 다른 데 가서 전도할 수 없느냐고 말하니까 듣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회를 진행하는 쪽에서 하두 지장을 많이 받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강제로 끌고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다시 오고, 다시 끌어냈지만, 다시 오고,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떠났습니다. 반드시 이런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믿음이 흡사 반이성적인 것이며, 반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사용한 단어 로기코스에서 보듯이 영적인 것은 곧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곧 영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술가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방식으로, 광신자들의 열광적인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아주 이성적인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 곧 가장 영적인 사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합니다.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성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해를 마십시오. 이성적이라는 말이 곧 이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수학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그냥 머리가 좋은 것이지 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이성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헬라어 로기코스가 이성과 영성을 가리키지 지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지성이 없어서가 문제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성은 차고 넘칩니다.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의 근본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1백년 전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교육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삶에 대해서 훨씬 지혜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탈세하고 뇌물받는 수단에 대해서는 너무나 아는 게 많은데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 초반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대는 그저 정보로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하듯이 아는 것이 힘인 것처럼 굴러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지식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나 좋은 배경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손쉽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즘 말로 그저 "노하우"일 뿐입니다. 참된 지식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삶의 근원(Woher)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농부가 대학교수나 변호사보다 훨씬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목회 차원에서도 역시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는 그 결과나 그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게 핵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지식인이라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했다는 사실을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종교 전통과 세상 상식에 대해서 빠꼼이 같았던 바리새인들이 정작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소경과 같았다는 예수님의 지적을 기억해보십시오. 참으로 신기하지요.
그래서 바울이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우선 탐욕적인 삶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지성적이고 세련된 삶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취에만 만족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데서만 삶의 목표를 삼는 게 바로 이 세대를 본받는 삶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런 삶은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더구나 영적인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적인 예배는 바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삶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시험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의 변화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1절 말씀과 연결해서 다시 정리해보면, 우리의 삶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시험할 줄 아는 삶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간단히 두 가지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부단히 그런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게 고정된 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서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당연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그의 뜻이 불완전하다는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 종말에 가서야 모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알아가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교회도 역시 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 당시에는 형식적으로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이후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노력이 없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고수하는 데만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완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이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종말의 시각으로 오늘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영성입니다. 이성적인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우리 자신의 우월감을 내보이기 위해서,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긴장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선 교회 자신의 모습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아닌지 이성적으로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과연 생명지향적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합리화인지 이성(영)적으로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아직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선과 악의 판단능력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있다거나, 더 나아가서 자기가 독점하고 있다는 듯이 생각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이며 불경입니다. 단지 자신의 "IQ"만 갖고는, 자신의 지성만 갖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성적이고 영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 헌신예배를 드리는 수석교회 제직들과 모든 성도들은 이 세대의 특징이라 할 자기 고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자기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시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삶이며, 동시에 우리가 드려야할 이성적인 예배입니다.
<2003.1.19.수석장로교회, 제직헌신예배>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