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로서의 삶
극우와 극좌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세상에서 겪어야 할 모든 삶의 조건들로부터 해방된다고 말입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늘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게 된다는 생각도 곁들여보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교회는 사람들로 터져나갈 겁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모순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삶의 현실은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아주 엄중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엄중한 현실 앞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든 구체적인 현실들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직 교회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거의 교회나 기도원 같은 곳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방언, 신유 같은 신비적 현상에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그들은 빈부격차가 심화되어도, 남북분단 체제가 공고해져도, 외국노동자들과 동성애자들 같은 사회 마이너리티가 인간 존엄성을 훼손당해도 아주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어려움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투쟁하고, 참여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완전히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만 이 세상을 해석하고 그런 방식으로만 대처합니다.
이 두 극단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는 제가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한 마디만 하지요. 전자에 속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한 세상과 그 역사를 방기한다는 것이며, 후자에 속한 사람들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입니다. 양측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이게 사실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데, 그들의 영성이 심화되거나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의 영성은 삶의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에 관념적이며, 후자에 속한 사람들의 영성은 하나님으로 주어지는 은총과 단절되기 때문에 결국 허무합니다. 양측 모두 그리스도교적 영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우리는 어떻게 삶의 현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요? 앞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았을 겁니다. 이 양 극단의 중간 정도 되는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길이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 극우, 극좌, 중도로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혜
오늘 본문 말씀은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성서기자가 깊은 생각과 지혜로움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가 구체적인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현실과 아무런 상관없이 홀로, 골방에서, 사막에서, 허공에서 고고하게 살아가도 된다면 그는 굳이 깊이 생각하거나 지혜로워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발을 땅에 딛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숨 쉬어야 하고, 함께 먹어야 하고, 신경전을 벌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투쟁하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깊은 생각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16절 말씀에 따르면 “악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순박하기 때문에 요즘 우리에 비해서 훨씬 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가봅니다. 그게 바로 인간 본질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또는 앞으로 2천년 후나 인간 세상에는 악이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원천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창세기의 타락설화는 그것을 뱀 형상으로 설명하고, 욥기서는 사탄으로 설명합니다. 성서의 이런 진술들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게 아니라 악의 존재론적 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악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는 우리의 모든 걸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악하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런 가르침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 인간은 죄인이야, 또는 세상은 말세야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악이 실제로 자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악과 죄라는 것을 어떤 뿔 달린 괴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 구체성을 놓치기 쉽습니다.
여러분, 악은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성서기자가 말하는 그 시대는 핵심적으로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로마의 법, 군사, 예술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시대의 번영은 아직 이탈리아 로마 및 식민지로 삼았던 지중해 연안의 중요 도시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모든 세계는 바로 이 로마 제국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경제, 군사 만능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이런 점에서 가장 전형적인 나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악한 시대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으면 우리는 그걸 전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치 돌팔이 약장사의 그럴듯한 속임수에 속는 사람들처럼 이 시대의 요구에 눈이 먼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그렇다면 지혜롭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혜라는 단어 자체는 철학적인 용어입니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필로스’(사랑)과 ‘소피아’(지혜)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게 곧 철학입니다. 성서 기자는 이런 지혜를 지금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그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지혜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에 매달리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가 참고할 사항이지 따라야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서는 그것보다 훨씬 궁극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지혜는 “텔레마 투 퀴리우”(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런 대답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주님의 뜻” 운운하는데, 너무 일반론적이고 상투적이라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텔레마는 너무나 고정된 모범 대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텔레마는 그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추동해가는 영적인 리얼리티였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텔레마가 무엇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전도하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겠지요.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말은 아닙니다. 충분하지 않다면 틀릴 수도 있는 말이겠지요. 이런 것들은 일종의 율법입니다. 물론 좋은 뜻의 율법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율법 신앙과 맞서있는 미세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율법은 옳은 삶의 기준이며 태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모두 담아내지 못합니다. 만약 율법이 이러한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이 절대화하면 결국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게 됩니다. 옳은 것이지만 여전히 본질이 아닌 것을 움켜쥐고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몇 가지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단순히 우리의 삶을 개량하거나 계몽하는 게 아니라 우주론적 구원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주님의 텔레마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서로 모순적인 주장처럼 들릴 겁니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알지 못하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모른다’는 말을 조금 설명해야겠군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를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아는 게 없습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그런 세계를 완전히 유한한 세계 안에 던져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중세기 때 로마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주님의 텔레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뜻이라고 용감하게 부르짖는 분들을 보면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당신 이야기 때문에 더 혼란스러워졌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18절) 영에 사로잡히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본문이 포도주를 언급한 이유는 예배 중에 술에 취하는 이교집단의 종교의식을 비판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성령 충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조입니다.
찬양과 감사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아는 지혜로운 삶이 성령과 연결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영에게 의존한다는 의미입니다. 흡사 시인들이 언어의 존재론적 힘에 사로잡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힘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성령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음악공부는 소리가 내 영혼을 울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성령이 내 영혼을 울리게 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도록 준비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앞장 서는 것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거나 성령에게 귀를 기울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의 뜻, 자기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힘을 주면 힘을 줄수록 이 세상은 망가지기만 합니다. 오늘의 문명이 지구를 얼마나 위태롭게 하는지는 이미 잘 드러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사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자기 업적에 취하고 맙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오늘 본문 19,20절이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묘사입니다. 찬양과 기도와 감사가 바로 성령을 가득하게 받은 사람의 삶이고, 거꾸로 성령을 가득하게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첫째, 믿는 사람들이 함께 찬송가를 불러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일치가 여기서 경험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신뢰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을 담고 있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바로 성령 사건이며, 생명 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예배는 단순히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삶 전체를 관통해야 합니다. 가정, 학교, 노동 현장, 투병의 현장 등등, 우리의 일상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령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예배의 신비가 여러분의 일상에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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