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요 6:24-35)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글쓰기 특징 중의 하나는 “에고 에이미...”라는 형식입니다. “나는 ...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포도나무다,(15:1,5) 등등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5) 헬라어로 읽어보겠습니다. “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아르토스는 빵이고 조에는 생명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밥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이 바로 이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이 말씀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동의하고, 또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질문해야합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영적인 배부름이란?
요한복음 기자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두 가지로 보충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굶주림과 갈증을 실제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로 인해서 그런 육체적인 고난을 감당해야 할 기회가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밥은 실제적인 양식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못해서 그렇지, 잘 하기만 하면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미국을 예로 듭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이고 지금도 대통령이 성경 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서약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아서 세계 일등 국민으로 잘 산다고 말입니다. 이런 주장들이 왜 잘못인지는 제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나라 중에서도 잘 사는 나라가 있고, 기독교인이 많은 나라 중에서도 가난한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난하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특별히 잘 되거나 또는 특별히 안 되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 세상살이는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서 달라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생명의 밥은 실제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대답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영적으로 배부르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이 만족스러워진다는 뜻일까요? 영혼의 배부름일까요? 이 대답은 일단 옳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말만 영적인 만족, 배부름이라고 하지 실제로는 그런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우리의 영혼은 고달픕니다. 불안합니다. 허무하기도 합니다. 영혼의 안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이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할까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쉽게 냅니다. 최소한의 인간관계가 서툰 경우도 많습니다. 가족과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영적인 만족감을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말로는 영혼의 만족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불만족입니다. 이런 모순을 감추기 위해서 열광주의와 경건주의 신앙으로 빠져듭니다. 철야기도회에 나가서 은혜 충만히 받고 집에 돌아와 믿지 않는 남편과 싸웁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주일을 지키고 집에 돌아가 며느리를 구박합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속으로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예수 믿는다고 어떻게 천사처럼 살 수 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이 삶과 분리되는 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영적 배부름이라는 신앙의 현실이 우리의 삶과 일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구도적인 삶입니다. 수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물 안에 들어가 연습을 해야지 그저 수영 교본만 읽어서는 곤란한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말씀드린다면, 구도적 삶의 출발은 ‘생명’이 무엇이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모르고서야 어찌 생명의 밥을 이해할 수 있으며,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란?
오늘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한 구절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늘과 세상이 대비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떡이 있는 곳이고, 세상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세상의 생명은 하늘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건 물리적으로도 아주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지구 생명의 기초는 물과 빛입니다. 물과 빛이 없으면 생명이 불가능합니다. 민들레와 아메바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현상은 물과 빛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지구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태양 빛이 50%만 줄어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땅은 사막으로 변하거나 지구가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이게 될 겁니다. 그것으로 모든 생명은 끝입니다. 달도 지구의 생명 현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달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중력입니다. 달의 중력으로 밀물과 썰물 현상이 생길 뿐만 아니라 판 운동이 일어납니다. 판 운동은 지구의 중력과 달의 중력이 서로 작용해서 지구의 껍질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다시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지질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판 운동으로 인해서 지구의 생명 현상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와 우주 물리학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그마한 과학적 정보로 잘난 체 하는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일의 삶이 바로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똑같았습니다.
출 16장에 나오는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런 요구를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 16:31) 유대인들은 그런 사건을 하나님의 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떡, 생명의 밥이었습니다. 이런 표적을 갖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를 그들은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신앙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표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배불렀던 경험으로만 기억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는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쉽게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광야생활 중에 그들이 얼마나 자주 출애굽 자체를 후회했는지, 모세를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의 이방 신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체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만 생각한 겁니다. 지금 배부른가 아닌가만 생각했습니다.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배고프면 그것으로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배부르게 해 줄 수 있는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처럼 만나 사건을 계속해서 일으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오병이어 이야기입니다.(요 6:1-15)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현대인들도 그런 정치가가 나오기를 바라겠지요. 경제를 잘 운용해서 국민 모두 배불리 먹고 마음대로 쓰고도 돈이 남아도는 세상을 원하겠지요. 지난 대통령 선거도 그런 요구가 그대로 표출된 것입니다. 요즘 젊은 20대가 보수화 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들이 원하는 인생 최대의 목표는 대기업의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입니다. 민족, 역사, 정의, 공동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제2의 모세가 나타났다고 환호했습니다. 요 6:15절에 따르면 민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뿌리치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끈질기게 다시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라.”(요 6:26) 여기서 표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오병이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부른 것에만 마음이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이르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무슨 말인가요? 먹어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밥은 썩는 양식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매일 산해진미로 배불리 먹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죽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곧 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중요하더라도 사람은 먹어야 사는 데, 배불리 먹고 재산을 모으는 일을 부정하는 건 인간을 영육 이원론적 시각으로 보는 잘못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공산주의나 오늘의 신(新)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 이런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이 양자는 모두 인간이 물질적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려는 정치 이념입니다. 먹고 배부르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인간 구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과 선동이 인류 역사를 계속 지배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양식
주님은 전혀 다른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그것입니다. 그 양식이 곧 생명의 밥입니다. 그 생명의 밥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으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따분하게, 또는 너무 거리가 멀게 들릴 겁니다. 그들에게 지금 생생한 것은 썩을 양식뿐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다시 먹어야 사는 그런 양식 말입니다. 소회불량에 걸리면 아무리 맛있어도 먹을 수 없는 그런 양식 말입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람은 영생의 양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병이어로 모두가 배불리 먹은 사건에서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표적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의 만나 사건도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모세 같은 민족 영웅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개입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배부른 것에 빠져서 그 사건을 놓친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개입이 바로 표적입니다.
아직도 영생의 밥이라는 말씀이 모호한가요?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생명은 분명히 썩을 것입니다. 썩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라면 영원한 생명 운운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발버둥 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생명을 그런 좁은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 생명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생명이 다가오고 있으며, 종말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게서만 그 생명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생명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무(無)로부터 세상을 가능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의 하나님만이 우리 피조물의 생각을 뛰어넘는 생명을 완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생명의 밥을 먹게 해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밥이 예수님입니다. 이 생명의 밥은 아무리 먹어도 다시 배고픈 썩을 양식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독교 신앙은 지난 2천년 동안 신앙의 중심으로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옳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운명을 걸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니겠지요. 이런 신앙은 썩을 양식과 영생의 양식을 구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썩을 양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만이 영생의 양식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거꾸로 영생의 양식을 맛본 사람만이 썩을 양식의 한계를 뚫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밥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영혼은 그분을 통해서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200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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