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0:22-30, 부활절 제4주, 4월21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누군가요? 그 답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내용은 마 16:13절 이하에 나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비슷한 내용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묻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은 지난 2천년동안 모든 기독교들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세례 문답을 할 때 이런 대답을 하고, 예배의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그렇게 고백합니다만,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그런 믿음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로서, 그 뜻은 구원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그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나 할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대개의 기독교인들에게 막연합니다. 태양이 지구의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꾸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기도 하고, 매일 전도하러 다니기도 하고, 교회생활에 매달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글씨를 적은 팻말을 들고 다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불치병이 낫다거나 부도 직전의 사업이 회복되었다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변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된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종종 나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도 있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일까요? 그래서 지금도 그런 증거들을 찾아다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종교적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특이한 현상을 보았다고 해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눅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로 살다가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서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비록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전해도 듣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그런 현상으로 증명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증명될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모두 궁금하게 생각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가?
오늘 설교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24절) 당신의 정체를 밝혀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그들의 간절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칭 그리스도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거기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당하게 밝혀라.’ 이 말은 거꾸로 예수님이 스스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25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런 표현은 뜻이 애매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실제로 말했다는 건지, 아니라고 말했다는 건지 이 표현 자체만 놓고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적으로 “나는 그리스도다.” 하고 말씀하셨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할수록 진정성만 떨어집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해주는 걸 좋아하긴 합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말은 진리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거짓을 담기도 합니다. 사기꾼들은 대개 말을 잘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입으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예수님 자신의 그리스도 성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이 종종 나오긴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재판 장면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눅 22:67).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하십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대제사장들은 이어서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 22:70).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피고 신분으로 빌라도 앞에서 서신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네 말이 옳도다.”(눅 23:3) 이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떻게 들립니까? 상대방의 진술을 인정했을 뿐이지만 당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합니다. 요한복음이 그것을 “나는 ... 이다.”는 문장으로 전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목자, 양의 문, 포도나무, 길, 진리, 생명 등으로 말씀하셨지 딱 짚어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속 시원하게 대답해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같은 25절에서 조금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일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전했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사죄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였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증거에 대해
저는 앞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 사건이나 귀한 가르침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그것이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설명처럼 들릴 겁니다. 여기서 성경읽기의 길을 잃지 않으려면 복음서 전체를 신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병을 고친 사건 자체는 별 것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지금 의사들도 합니다. 그것 자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요한 분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맛있는 밥상이 있습니다. 이 밥상 자체는 흔한 겁니다. 식당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그 밥상은 그냥 하나의 일상적인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 밥상을 어머니가, 또는 아내가, 또는 남편이 정성스레 차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밥상은 차원이 달라집니다. 밥상이 어디서부터 왔느냐가 밥상의 근본 의미를 다르게 합니다. 병 고침 자체는 별 것 아닙니다. 병을 고쳐도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누가 병을 고쳤는지가 중요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벌어졌던 어떤 사건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 운명의 마지막 때 일어난 어떤 사건의 빛으로 공생애 사건을 뒤돌아 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건은 부활입니다. 부활 이전에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당시로 돌아가서 제자로 살았다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게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해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은 해도 실제로는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이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예고를 알아듣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재림해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분의 재림은 초림과 달라 누구나 알아보는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본질도 새로워졌습니다. 그제야 공생애 중에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들과 말씀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그들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 제자들만 부활을 경험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믿게 되었냐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설령 예수님을 따르지 않거나, 또는 반대했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면 믿을 수 있지 않았겠냐,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이런 질문에 지금 제가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왜 ‘악동 뮤지션’만 음악적 재질을 타고 났느냐, 왜 김연아만 피겨 스케이트의 높은 수준에 들어갈 수 있느냐, 왜 아인슈타인만 물리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냐는 질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은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섭리 등으로, 또는 신비라고 말합니다.
“내 양”
왜 제자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가 그리스도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내 양’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내 양이라는 단어는 선택, 섭리, 신비라는 개념을 가리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내 양’, 즉 예수의 양에게만 들어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아주 특수합니다. 서로 생명을 공유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담보합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목자에게 위임합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 곳이라면 아무리 위험해보여도 갑니다. 자기 목자와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구분합니다. 자기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목자와 양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게 이해되시지요?
이 생명의 관계를 요한복음 기자는 28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생명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죽음도 예수님이 주시는 이 생명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참된 생명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생명을 빼앗을 자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인은 바로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인 부활 생명을 경험했기에 예수님이 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옳습니다. 그런 인식과 믿음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의 권력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엄청난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를 통해서 영생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31절). 그런 상황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돌을 듭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를 찾아 헤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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