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17년 7월9일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저는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 공부에 마음을 둔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가시지 않습니다. 그런 궁금증 중의 하나는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동의를 받아내든지 강력한 카리스마로 허튼 소리를 못하게 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내도록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고, 요즘 표현으로 ‘왕따’로 몰리다가 급기야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던 것일까요?
예수를 향한 비난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핵심적으로는 예수님이 율법을 절대화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 역시 그들에게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마 11:19절에 나옵니다. 들어보십시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판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먹는 걸 좋아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과 금지된 것을 아주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그 내용이 레 1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육지 짐승, 물고기, 새가 상세하게 분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육지 짐승 중에서는 새김질을 하면서 동시에 굽이 갈라진 짐승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못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삼겹살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레 10:9절에서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율법을 무시하면서 이방인들처럼 아무 거나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취했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먹을거리 문제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어떤 목사가 테니스장에서 동호회원들과 운동한 뒤에 그들과 함께 맥주 마시는 것을 다른 교회 장로들이 보고 비판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떨어지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거론된 세리와 죄인은 경건한 사람들이 상종하면 안 될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에 빌붙어서 자기 동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제치하로 본다면 일본제국 소속 세무공무원 정도 되었습니다. 죄인은 율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 파렴치범, 창녀 등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들과 친구로 지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간접적으로만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여자 중에서 한 사람은 몸을 팔던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잣대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으셨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이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보면 안 됩니다. 공연히 상대방의 약점을 트집 잡는 비인격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바꾸면 법조인이나 신학대학교 교수나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비판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세리와 죄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가다보면 공동체가 언제 깨질지 모릅니다. 안식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환자를 고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자꾸 예외 조항이 나오고, 그러다보면 안식일 개념이 결국 허물어집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굳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예수님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주장이 더 합리적입니다. 환자와 장애인은 안식일 다음날에 고쳐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내는,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블랙리스트 대상이 된 겁니다.
지혜로운 자 vs 어린 아이들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그들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하면서 먹기를 탐하거나 포도주를 즐기는 게 아니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내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려는 것뿐이라고 설득했으면 그들과의 관계가 괜찮아졌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시도했어도 별 효과는 없었을 겁니다.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타협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도 대화의 길은 찾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치는 사태를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대처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을 마 11:25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어린 아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은혜롭게 들리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처럼 종교 전문가들의 권위에 속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자와 목사들이 평신도들보다 더 잘 안다고 여기는 거와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당시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당시 종교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종교 전문가들도 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신학을 전공해서 목사 시험에도 합격했고 현장 실습도 충분히 거쳤으니까 아는 것이 많아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공부와 실습과 경험은 다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전문가들은 다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전문가의 결정적인 한계는 자신들이 뭔가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확신입니다.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작은지를 웬만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상대적으로 아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에 갇혀 있으면 결국 참된 앎으로부터 소외됩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 역시 그런 착각과 확신에 발목이 잡혀서 하나님의 뜻에서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철저하고 바르게 믿는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나름으로 합리적인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는 종교 이기주의에 떨어지는 행동을 많이 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고, 동성애 문제로 종교 재판을 열고, 친미 사대주의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양 주장하고, 북한을 무조건 적대시하는 일들이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종종 주장됩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로 묘사된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는 가난한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 밑바닥 인생들이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팔복’에서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5:3,4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목사의 경우로 말한다면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영혼이 자기의 목회 업적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큰 교회를 책임지는 목사는 무거운 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짐에 치여서 하나님의 뜻에 영혼의 귀를 기울일 수 없고, 그 뜻에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진 사람입니다.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지식에 파묻혀 있는 사람도 무거운 짐을 진 사람입니다.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 수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자기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지혜와 슬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계속해서 무거운 짐을 억지로라도 지는 겁니다. 그러니 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좀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어딘가 잘못한 게 없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은 아닌지, 하고 불안해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마 23:4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서로 상대방에게 짐을 지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행복감 지수가 형편없이 낮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된 안식
예수님은 그런 사회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8-30절 말씀을 그런 도전으로 생각하고 들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쉬게 한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내게로 오라.’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모든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참된 쉼이 보장될까요? 여러분은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 경험하고 있으신가요?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살이 자체가 너무 힘들다고 여길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런대로 살아갈만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어떤 자영업자가 있다고 합시다. 사업이 잘 안 됩니다. 집세를 내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에게는 삶이 무거운 짐입니다. 또는 자식이 말썽을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족 중에서 큰 병이 들어서 힘들기도 합니다. 그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겠습니까.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불러서 쉬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좋은 정치인을 일꾼으로 뽑으면 국민들의 어려움들이 실제로 많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특별하게 대우하면서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너희에게 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쉼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쉼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쉼은 안식입니다. 안식은 우리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인생은 고해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제가 목사니까 목사의 예를 드는 게 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무거운 짐이었던 것처럼 목사에게서 무거운 짐은 목회입니다. 목회에서 손을 떼면 일단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따라서 쉼이 주어지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목사의 내면이 어떤 것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식은 불가능합니다. 목회를 그만두고 쉰다는 것은 그에게 안식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입니다. 아무리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꾸린다고 해도 그의 영혼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삶의 상투성에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서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생명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재미’를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런 재미에 탐닉하면 그 대상은 우상입니다.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우상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게 아니라 잠시의 휴식만 줄 수 있습니다. 휴식과 안식은 다릅니다. 휴식은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지만 안식은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때만,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만 우리의 삶에 안식이 시작됩니다. 왜 그런지 설명을 더 듣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약속받았고 이미 그 생명 안에서 산다면 그는 세상에서의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지 않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서의 삶을 짐으로 느끼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생명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생명을 이미 받은 사람이라면 거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거기에 강요받지 않아도 됩니다.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에게 인생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대학입시에서 이미 수시에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남은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 공부를 재미있게 하지만 부담감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하셨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알게 모르게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에 묶여 있는 셈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게 가보십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비록 겉으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 설교보기는 아프리카 티브이 파일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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