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복음
막 1:9~15, 사순절 첫째 주일, 2021년 2월21일
기독교 설교의 토대는 신학 용어로 케리그마(kerygma)라 합니다.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는 구약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에서도 가능한 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이 예수 사건이 핵심입니다. 문제는 과연 예수가 누군지, 그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예수를 모르면서도 교회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종교심이 있어서 그 종교심만 자극받으면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 기독교인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종교심에만 머물러 있는지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도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잘 모릅니다. 그 문제는 성령께서 하실 일입니다. 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만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전할 뿐입니다. 저의 위치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상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는 미술사 전공 교수와 같습니다. 그 피에타상에 담긴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예술혼을 깊이 이해하도록 도울 뿐이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는 누굴까요? 우리는 왜 예수를 존경하는데 머물지 않고 믿는 데까지 나아갈까요?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대답은 아주 명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는 네 복음서에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이 실제로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거나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게 복음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믿고 산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진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설날에 떨어져서 살던 가족들을 만나셨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서 불편하긴 했겠으나 소규모라 하더라도 만난 분들이 계시겠지요. 이번이 아니라 다른 가족 모임을 생각해도 됩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나요? 저는 그게 정말 궁금합니다. 기독교인 가족이 만나도 교회 이야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누님은 제가 전화를 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가족일수록 그런 대화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복음으로 경험되지 못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10억 원짜리 복권이 당첨된 사람이라면 늘 복권 이야기를 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 복음의 콘텐츠는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 중에서 셋째 단락인 막 1:14~15절에는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다.”라는 소제목이 달렸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복음을 15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런 구절을 읽으면 늘 듣던 내용이라서 새로울 게 없다고 느낄 수도 있고,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거리가 먼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깊이 있게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기도 합니다.
위 구절에 네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때, 하나님 나라, 회개, 복음이 그것입니다. 때는 헬라어 카이로스의 번역입니다. 카이로스는 단순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의미 충만한 시간입니다. 기원전 3세기 목욕 중에 황금 왕관 무게를 재는 방법을 문득 깨닫고 “유레카”(알아냈다.)라고 소리치면서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로 뛰어나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그 순간과 비슷한 시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KJV은 “The time is fulfilled.”라고 영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충만하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나 현실로 다가오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허하게 들립니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요.
두 번째로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충만해졌다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미 지금 여기에 현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실감이 안 느껴지면 이 말을 “죽음이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젊기에 죽음이 너무 멀게 느껴질 겁니다. 저처럼 늙은 측에 속하는 사람들도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피상적으로 대합니다. 죽음을 실제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모든 미련을 정리합니다. 그런 정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에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저의 소유물을 폐기할 겁니다. 책, 옷, 각종 물품, 통장 등등입니다. 가능하면 제 몸뚱이 처리만 다른 이의 손을 빌리게 말입니다. 평소에 물건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처리하기 힘들 겁니다. 이런 준비보다 더 중요한 준비는 하나님 품에 안기는 연습입니다. 그런 연습이 충분해야만 죽는 순간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연습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아기는 어머니가 자기 생명입니다. 그 어머니를 냄새와 목소리와 얼굴과 감촉으로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안겨있기만 하면 아기는 생명을 충만하게 느낍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이 아기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임마누엘의 신앙을 알기에 인생살이를 기쁨과 평화 안에서 만족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게 더는 필요 없는 영적인 지경에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인생살이가 고달픈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한가롭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노숙자나 쪽방촌에 사는 사람이나 암 병동 환자들은 매 순간의 삶이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다 피하고 싶은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하는 위로와 안식이 그들에게 제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역경 가운데서도 시인들이 시를 쓰고, 작곡가들이 작곡하듯이 현재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위로에 집중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게 우리의 세계 경험입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말은 틀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기에 그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은 모두 그 나라의 능력에 휩싸입니다. 그 준비가 바로 세 번째 단어인 회개입니다. 회개를 가리키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삶의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돈 버는 방향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선하게 돈 쓰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안에 갇혀서 살았다면 이제는 자기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테니스도 승부보다는 놀이와 사귐의 차원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대도시의 아파트 문제도 그렇습니다. 아파트는 소유가 아니라 거주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아주 흔한 말이라 이런 말을 했다가는 많은 이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 즉 방향 전환은 힘듭니다. 오늘의 이 살벌하고 척박한 현실에서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기독교인이면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왜 이토록 세속적인가 하고 자책하면서 사는 게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심리적인 불안감에 떨어질 뿐입니다. 거꾸로 기독교인도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니까 세상 흐름에 맞춰 살아야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에 떨어지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앙겔리온
제가 보기에는 막 1:15절에 나오는 중요한 네 단어 중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는 단어가 이 질문의 대답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복음은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라는 인물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를 전하면서 목동들에게 천사가 한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그 소식은 다윗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어서 천군과 천사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가 누구이기에, 그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것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단락에는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한 대답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9~11절은 예수님의 세례를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해서 살겠다는 종교의식입니다. 세례 보도는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살아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와의 동질성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12~13절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보도합니다. 병행구인 마 4:1~11과 눅 4:1~13은 마가복음과 달리 마귀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을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첫째는 돌들로 떡이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며, 셋째는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인류에게 늘 따라다니던 생존 본능입니다.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물질적인 욕구, 자신의 초능력을 확인하려는 욕망, 그리고 세상에서 권력과 명예를 얻고 싶다는 본능입니다. 이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도 하나님처럼 선악을 구별할 정도로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욕망이 반드시 나쁜 게 아닙니다. 이런 욕망으로 인간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이런 욕망을 실현한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습니다. 기업가가 나타났습니다. 과학과 시민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다 좋은 일들입니다.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도 이런 힘이 필요하긴 합니다. 교회 재정이 충분해야만 교회 일꾼도 키우고 어려운 이들도 돕고 선교 사업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그는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선지자나 사회 개혁가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가지 유혹을 다 물리쳤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똑같이 증언합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경제 부흥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위대한 업적과 마귀에 절하는 유명인이 되는 일에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정말 많은 사람의 피땀이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이런 노력으로 인류 역사에서 큰 진보를 이뤘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민주화가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나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복음은 자격이 없는데도 자격 있다고 인정받는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격만큼 대우받는 세상의 이치에 길들어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더 많이 대우받으면 불공정하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그런 불공정을 유별나게 못 참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불공정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미 하나님에게서 일방적으로 많은 것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인정하세요? 사람이 지구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다른 동물들은 불공정하다고 항의할 겁니다. 선진국의 소비 생활을 보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불공정하다고 비난할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불공정한 이 세상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복음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머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수용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기자가 복음을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고 “믿으라.”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이해보다 믿음이 더 높은 단계이니까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세상에 와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그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값없이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충만해졌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일상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 그러니까 예수라는 인격과 그의 운명에 하나님 나라가 현실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과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와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그럴듯하게 들리나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제가 예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거나, 그분들이 세상살이의 논리에 적당하게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기억해주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아니 우주 역사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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