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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mms://61.100.186.211/pwkvod/dawp/dawp_080803.wmvmms://wm-001.cafe24.com/dbia/dawp_080803.mp3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2008.8.3. (마태오 14:22-33)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읽은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비슷한 관점에서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가 흔하게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 복음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도 있고, 마태와 마가복음에만, 또는 마가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간혹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드믑니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는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마태가 마가복음을 토대로 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한 보도인데, 마태와 마가의 이야기가 크게 보면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하나는 이야기의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결론입니다.
첫째, 이야기의 구성에서 볼 때 베드로의 역할을 다루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두 복음서가 다릅니다. 큰 파도가 일어서 제자들이 탄 배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육지에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이 그 배 가까이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래서 유령이다, 하고 고함을 치자, 예수님은 당신이 누군지 밝히고 안심하라고 일렀습니다. 여기까지는 마태와 마가복음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그 뒤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28절에서 보도하고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걸어오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주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바람이 불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아 건져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둘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그 사건의 결론을 전혀 다르게 내립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했습니다.(마 14:33) 제자들이 크게 깨달은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의 마음이 무뎌져서 바로 앞서 일어났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일어난 이 사건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똑같은 이야기를 왜 서로 다르게 구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일까요?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반면에 마태는 제자이니까 아무래도 마태의 이야기가 더 정확한 것일까요? 아니면 마태가 별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마가의 원래 이야기에다가 보탠 것일까요? 신약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에 따르면 마태나 누가보다는 마가복음이 원래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떤 복음서에 실린 이야기가 오리지널에 거 가깝냐, 하는 건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증적인 역사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복음서 기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뉴스를 보도하듯이 기술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경험을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에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똑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구성하고 다르게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바로 성서 기자들이 단지 속기록자의 역할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해석하는 신학자이며, 예언자이고, 영성가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는 마태의 신학이 중요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신학적인 문제를, 설교의 서론이라 하기에는 다소 길게 거론한 이유는 이런 걸 전제하지 않으면 오늘 본문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분이니 하나님의 아들임에 분명하다거나, 말씀에 의지해서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던 베드로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오직 말씀으로 승리하자고 역설하면 한편의 설교로 충분하겠지요. 저는 그런 일반적인 관점에 머물지 말고 조금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분을 그쪽으로 안내하려고 합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의 신학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마태가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유령이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시달렸다고 합니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왔다고 합니다.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제자들은 풍랑과 싸우느라 지쳤습니다. 새벽 네 시라고 하면 어둠이 가장 깊을 때이겠지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사람이 험한 파도를 헤치면서 물 위를 걸어왔습니다. 그걸 본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오신 걸까요? 풍랑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누굽니까? 그들 중에는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서 평생 어부로 산 사람들이 여럿 됩니다. 그들에게 이런 풍랑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조금 고생은 하겠으나 잘 헤쳐 나올 겁니다. 그들의 고생이 안쓰러워서 예수님이 오신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요? 복음서에는 초능력처럼 보이는 그런 사건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본문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또 하나의 사건도 있습니다.(마 8:23-27, 막 4:35-41, 눅 8:22-25)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피곤하셨는지 예수님은 배 앞머리에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면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신 후,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다고 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요 2장)을 비롯해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를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서 기자들이 분명히 예수님의 초능력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만, 초능력 자체가 핵심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예수님의 초능력을 강조하는 문서들은 모두 위경으로 밀려났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십자가에 무력하게 처형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초능력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서로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어떤 다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마태 공동체가 처한 어떤 영적 위기에 연루된 사건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마태는 풍랑에 빠진 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마태 공동체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상황은 대개 풍랑이 치는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비슷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바다, 또는 큰 호수 아래에는 악령이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준동하면 풍랑이 칩니다. 동양 사람들은 바다에 용왕이 산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 위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를 유령이라고 고함친 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유령을 본 것처럼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베드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베드로는 네가 원하면 물 위를 걸어서 “오너라.” 하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물로 뛰어들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이 세상은 거센 바람입니다. 그런 세상 앞에서 교회 공동체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전승을 통해서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축귀, 지혜로운 말씀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던 바로 그 시대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이상하게 보입니다. 상황을 바꿔서, 지금 교회에서 장애가 실제로 치료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메스컴에 오르내리고, 교회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겁니다.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건처럼 죽었던 사람이 실제로 살아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기독교 신자가 호수 위를 걷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고 기도한 후 실제로 호수 위를 걸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나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런 특별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실제로 많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이 몰려들었겠지요.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따르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미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명명백백합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새벽 네 시에 풍랑이 이는 호수 위에서 침몰 당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한 한 척의 배와 같았습니다.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조소와 냉소가 따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조차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나쁘면 그것마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떨며 “유령이다!” 하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워 물속에 빠진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한다면, 공연히 헛수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존경 받으며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하나의 사실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사실에 모든 삶을 걸어두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는, 또는 열광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마태 공동체는 자신들을 풍랑을 만난 배로 묘사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위의 설명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니까 참 좋더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겁더라, 늘 찬송가가 입에서 흘러나오더라 하고 생각하겠지요.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런 신앙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한번 거치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해야 할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걸어둔 신앙의 근거가 모두 허물어지는 경험입니다. 마태 공동체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속에 빠지는 베드로를 향해서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하신 말씀도 그것을 가리킵니다.

“에고 에이미”
본문에 따르면 “유령이다!” 하고 소리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마 14:27) 여기서 ‘나다.’는 헬라어는 ‘에고 에이미’인데, 영어로 ‘I am’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유령이라고 잘못 본 그것이 바로 ‘나 예수다.’라는 뜻입니다.
‘나 예수’는 누굽니까? 그는 그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입니다. 하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바로 그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신앙경험이며 신앙전승입니다. 제자들마저도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잘 몰랐습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을 경험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증거밖에 없습니다.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 통치입니다. ‘에고 에이미’, 즉 ‘내가 그다.’는 말씀만이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바로 그 예수가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에게 절하고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 즉 예수가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에서만 호수, 풍랑, 파도, 파선, 유령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참된 평화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고난과 풍파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앞에 유령은 계속 출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헛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분이 예수님인지 유령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많을 겁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모든 걸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왕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십시오. 그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유령에 홀리지 않고 ‘에고 에미미’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주시는 놀랍고 참된 평화를 선물로 받으실 겁니다. 아멘!

마태복음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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