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성령강림후 넷째 주일, 2019년 7월7일
1.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칠십 명의 제자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 중에 랍비라 불리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목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곳에 정착해서 가르치는 랍비가 있었고 유랑하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후자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랍비라 불리는 걸 원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대접을 받지 말라고(마 23:8) 가르치셨습니다만 겉으로 나타난 행태는 유랑 랍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유랑에 동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열두 제자입니다. 그 이외에도 가깝게 멀게 따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구성원들과 비슷합니다. 구심력 안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고, 좀 떨어진 사람도 있고, 원심력에 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집단 중에 7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에게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측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열두 제자와 같은 차원에 속하는 명령을 받고 수행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 9:1-6절에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0:1-12절에는 칠십 명의 제자들을 세우고 열두 제자에게 주었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하면,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오늘날도 국내외에 전도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문서로 전도하기도 하고, 노방전도도 합니다. 예수님이 칠십 명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이 특이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이상합니다. 유랑 전도자들의 필수품을 준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전여행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전도하려면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데도, 그것마저 금지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는 없습니다. 가능한 많은 선교 기금을 끌어들입니다. 선교사들의 생활 수준 역시 현지인들보다 높습니다. 1970년 초 제가 서울신학대학교 학부 생활을 시작한 캠퍼스는 서울의 충정로 언덕에 있었습니다. 신학교 건물이 있는 언덕에 미국 선교사들의 사택도 여러 채 있었습니다. 대부분 한국 사람이 겨울철 난방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인데도 선교사들의 사택은 본국의 생활 수준에 못지않을 정도로 냉난방이 잘 갖춰 있었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신발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파송을 자기 삶의 본질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직접 전도에 나선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의 파송은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내라는 명령입니다. 생명에 집중하려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 등의 일상용품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더 나아가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문안에도 신경을 꺼야 합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빼고 어떻게 우리의 인생살이가 성립될 수 있냐, 인생살이가 성립되지 않고서 생명 구원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누가 말하기 전에 저절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이런 문제에 휘말려 있습니다. 우리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게 우리의 숙명입니다. 이런 숙명을 이용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 권력은 우리에게 전대와 배낭과 신발에 대한 걱정에 매달리게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거기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려고 예수님은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전대나 배낭과 신발을 준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삶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2) 그것들은 아무리 많아도 근원의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3) 우리가 애쓰고 준비한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손에서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평생 전대와 배낭과 신발을 준비하다가 삶이 무엇인지,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붙들지 못하고 인생을 끝낼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삶의 태도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에게서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송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의 전체 실존에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칠십 명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빌고 집주인이 주는 것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유랑 설교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병자를 고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의 한 징표입니다. 왜곡된 삶이 고침을 받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11절입니다.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린다는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 불편하게 들립니다. 상종하지 않겠다거나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는 이런 일로 실망하지 않고 다른 데서 소명을 더 잘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제자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똑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제자 파송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한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은 이 말씀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거나 가깝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예수 임신 사실을 전하는 천사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에게 사 7:14절을 인용하여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일렀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마 1:23). 우리가 예수를 세상에 전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아는 사람만이 그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며, 예수로부터 파송 받은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즉 생명의 능력이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빅뱅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진화의 방식으로 지구에 생명체를 출현시킨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생명 현상은 불가능합니다. 지구에 생명 멸종의 위기가 몇 차례 있었지만,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곰팡이와 박테리아가 지구의 생명 조건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새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짐승들은 숲과 들과 산에서 자기들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지금 살아있습니다. 각자 삶의 형편은 다르겠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메시지에 충실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왜 이렇게 자기 인생이 안 풀리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 이리 아프고,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소아암 병동에 가면 더 절망적인 심정을 품게 됩니다. 평생 고생하고 늙어 폐지를 손수레에 끄는 노인들의 인생은 누가 책임집니까?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와 사탄이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난민들을 비롯한 알 수 없는 재앙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빈부격차는 왜 줄어들지 않는 걸까요? 남북은 왜 이렇게 오래 분단된 걸까요? 사이코패스 살인 사건과 우울증 자살은 여전합니다. 이런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선포할 수 있을까요?
요즘 저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대구 성서 아카데미’에 강독 영상 파일을 올리려고 정독하고 있습니다. 맥그래스는 그 책에서 과학과 신학은 실재(reality)에 접근하는데 동반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우주, 즉 세상의 실재는 단순히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데이터에 한정되지 않고 훨씬 심층적이고 다층적이어서 초월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입니다.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로 전해지는 경구인 ‘부처 눈에는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세상이 돼지로 보인다.’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관점으로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세상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대면하는 차원보다 훨씬 깊고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그 훨씬 깊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저항하는 신앙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생각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져야만 눈에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바둑은 겉으로 볼 때 아주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무한정의 길과 수가 있습니다. 길과 수는 진행 과정에 따라서 늘 변화무쌍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길과 수가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려면 자신의 바둑 실력이 늘어야 합니다. 실력이 달리면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앙의 차원이 깊어져야만 하나님의 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신앙의 실력이 높아지는 방법의 하나는 성경과 신학 공부입니다. 이 공부는 바둑의 정석 공부와 비슷합니다. 그 정석이 바둑 시합에서 정답은 아니지만, 그 대답을 찾아가도록 돕습니다. 한 가지 정석을 설명하겠습니다.
성경과 신학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창조주라는 말은 컴퓨터나 자동차를 만드는 발명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을 쓸모 있게 활용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는 아름답고 선합니다. 창 1장이 이를 반복해서 말하며, 성경 전체가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예수님도 하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지금 우리 눈에 뭔가 비틀린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근본에서, 그리고 총체적으로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무너집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 낭만주의자의 발언처럼 들릴 겁니다. 이 세상의 악한 현실은 이런 신앙 낭만주의로는 극복할 수 없다고 그들은 비난합니다. 물론 개인과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벌어지는 악의 현실을 믿음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악의 현실에 의해서 원하지 않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외쳐야 합니다. 여기서 외친다는 말은 소리만 낸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현실에 저항한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제대로 저항하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경험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가 담보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선하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한마디로 세상이 제시한 기준에 들지 못한다는 불안이 그 이유입니다. 세상이 제시한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은데도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불안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그걸 이용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의 실정법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불안하게 할만한 근거도 많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아베 정권이 한국에 경제 제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뜬금없는 조치입니다. 힘을 합해서 맞서도 힘든 싸움인데 일부 몰지각한 한국의 정치인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자조적으로 비난합니다. 20세기 초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식민사관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지금 저는 국내외 정치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불안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많아서 어느 한두 사람이 이런 상황을 뚫고 나가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 파묻혀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외롭다고 부르짖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파송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파송을 받았습니다. 파송을 받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듯이 작동되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저항하는 삶입니다. 우리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헤치는 세력이 바로 악한 세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자본을 신으로 떠받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부단히 저항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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