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18년 3월25일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42.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요즘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을까, 하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이 중요하고, 또한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대답은 인류의 죄 용서와 구원입니다. 그 대답으로 궁금증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이시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말씀 한 마디로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을까요? 더구나 2천 년 전 십자가 처형에 관계된 정치사회학적 관련성을 알면 이런 대답을 순순이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2천 년 전 로마 제국 당시에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맹수들에게 뜯어 먹히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처형이 정치범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종교법으로 판결을 받았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정권에 무력 투쟁을 부추긴 정치범이 아니었는데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더 큰 틀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고난, 또는 수난이라는 운명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보도했습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고난 전승’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시작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막 14:1절 이하를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 처형으로 빠르게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수난, 고난 과정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연루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군중들도 포함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파송한 이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야간 심문을 당합니다. 심문 중에 조롱을 받습니다. 막 14:65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산헤드린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빌라도는 특별 사면을 내리는 유월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폭력범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주민들은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뒤로 십자가 처형 규칙에 따라서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하급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조롱당하고 모욕당합니다.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9,20). 군인들은 예수를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장소 옆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예수를 조롱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 내려오라.’(막 15:3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똑같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가 없도다.’고 조롱했습니다.
수난과 조롱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죽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낮 12시가 되자 땅이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식일 수도 있고, 짙은 먹구름일 수도 있고, 강한 모래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다른 발언도 보충했지만 마가복음은 이 한 마디만 전했습니다. 이것도 예상 밖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뭔가 확신에 찬 말씀을 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어떤 약속을 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에 관한 말씀을 강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버리시는가?’ 하고 외치셨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로이’였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답지 않은 태도를 보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쏟아낼 수 있는 발언입니다. 인간 숙명의 가장 낮은 곳을 실질적으로 경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발언입니다. 시 22: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서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구절을 기억하고 있던 예수님은 시편 기자의 심정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절규는 신세한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아니고 저항도 아닙니다. 삶에 대한 자포자기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자신의 영혼을 다 바쳐서 살다가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는 외침이자 고백이면서 기도입니다.
구원의 빛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인 죽음 앞에서의 절망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운명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뚫어볼 때만 구원의 빛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시한부 진단을 받은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이 우리만 피해가라는 법도 없으니 늘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게 좋습니다. 세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 사람에게 세 달은 그야말로 가장 농축된 생명을 경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1년을 그 사람은 하루처럼 살아낼 것입니다. 숨을 쉬는 그 순간에 그는 절정의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배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상상해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세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매달리던 인생의 업적이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을 미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혼자 절망하면서 죽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죽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주면 고달픈 삶을 이겨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죽음의 절망을 우리는 버텨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에 동의하기 어려운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말은 종교적인 덕담이지 죽음과 고난과 고독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음공부 잘하고, 세상에 미련을 끊고, 할 일 잘 마무리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게 최선이긴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속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처럼 죽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들에게서 고난당하는 신, 십자가에 달린 신, 죽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르침이 가현설입니다. 교부들을 중심으로 초기 정통 기독교인들은 이들과 투쟁했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아주 실질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급기야 매장 과정까지 보도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막 15:42절이 이하에 매장 이야기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을 안식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안식일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땅에 묻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따른 시간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특별한 민원을 넣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시체를 매장할 테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명망가였기에 빌라도는 이 사람의 민원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빌라도는 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에게 사형수 예수가 실제로 죽었는지에 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허락합니다. 요셉은 당시 풍습에 따라서 예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가족 묘지에 안장하고 돌무덤의 입구를 바위로 막았다고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매장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을 초능력자로 여깁니다. 그런 하나님이어야만 믿을만한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일종의 슈퍼맨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이해할만한 사건들이 자주 나오긴 합니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갈랐고, 태양과 달을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많이 행하신 분으로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인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기적적으로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것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신앙형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가 아니라 무능력자입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실패자입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분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당시에 누가 이런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겠습니까. 로마 문명이 기독교인들을 가리켜서 무신론자라고 평가한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 너머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을 통해서 제자들은 죽음을 전혀 새로운 깊이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죽음마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하기에 죽음도 역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을 잃는데, 그게 어떻게 생명이냐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름이 ‘담비’입니다. 큰 딸이 키우다가 대구로 독립해나간 뒤에 주로 집사람이 자식처럼 키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고양이 일로 언쟁을 벌였습니다. 이제 담비를 집안에서 키우지 말고 마당에서 키우자는 게 제 입장이고, 태어나면서 집안에서 키웠으니 밖에서 키울 수 없다는 게 집사람의 입장입니다. 하룻밤을 밖에서 자게 했습니다. 담비가 굉장히 무서워하자 집사람이 안 되겠다 생각해서 다시 집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담비에게 집밖은 거의 죽음과 같은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집밖이 바로 야생동물에게는 생명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가는 방식만을 삶이라고 하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어서 죽음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런 거부 반응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도 점점 위축되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새로운 생명의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빨리 죽어 그 세계로 가고 싶으냐고 저에게 다그칠 분은 없겠지요. 저는 지금의 인생이 더 좋다거나 죽은 이후가 더 좋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죽음까지도 역시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때가 오면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있으니, 저에게 빨리 죽으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 이야기에 특이한 대목이 나옵니다. 여자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형이 집행된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는 여자들에 관해서 막 15:40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으니...’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매장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 15:47). 이어지는 예수 부활 보도에도 역시 여자들이 핵심 증인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그 쟁쟁했던 남자 제자들은 안 보이고 예수 운명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들만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일이 우연일까요?
저는 이 문제를 신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합니다.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아이는 여자의 자궁에서 열 달 가까이 자라다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 순간에 산모도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아이도 역시 고통을 당합니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주어진 인생을 살다가 다시 죽음을 통과하고 매장되는 고통을 당합니다. 남자들은 옆에서 구경꾼으로 남았지 자신의 몸으로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원초적인 생명 사건에서 남자는 아마추어이고 여자들은 프로들입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민감성이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영적으로 아마추어이고 여자들은 프로들입니다. 남자들은 이성과 말(로고스)로만 세상을 경험하고 분석하지만 여자들은 느낌(파토스)과 행동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참여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이들이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2천 년 전 예수님처럼 곧 죽고 묻히게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볼 때 우리 인생은 그 순간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운명이 허무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순간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허무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생명이 완성될 종말의 거룩한 빛에 (이미 지금 여기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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