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주현절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눅 10: 25~37)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장 25~37절)

 

설날 우리 셈터교회에서 가장 어린 교우, 서윤이에게 딱 맞는 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윤보영 시인이 쓴 “설날은”이란 시입니다. 서윤이에게 먼저 들려주려고 합니다.

설날/오늘은/새뱃돈을 받고요

설날/오늘은/새로운 각오를 하고요

설날/오늘은/새로운 계획을 세워요

설날은/내가 주인공/내가 가장/행복한 날!

 

시인 오보영은 “설날”이란 시를 통해 우리 어른들에게는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우리 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집집마다/마을마다
온 나라 방방곡곡에/가족 사랑 훈훈하게 넘치고 있네
​자식은 부모에게 감사하며 효도하고/부모는 자식들이 대견해서 품어주고

사랑합니다!!/사랑한단다!!
​당신들이 계셔서/행복합니다
너희들이 있어서/든든하단다

​데워진 사랑열기/추위를 녹여/먼 데 있는 봄기운/서둘도록 재촉하네

 

참으로 감동이 담겨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고아들의 대부이고, 어린이의 교육에 있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교육학자인 페스탈로치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의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즐겁고도 행복한 기쁨이 가정의 웃음이며 그 다음은 어린이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인데 이 두 가지의 기쁨은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온 가정에 즐겁고도 행복한 기쁨과 웃음들이 넘치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을 바라보면서도 삶의 행복과 보람이 넘쳤으면 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혹 여러 사정으로 집에 오지 못한 자녀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자녀들 위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축복이 넘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체코 속담엔 “여러분의 집에서 목소리 높여서 으르렁 부르짖는 사자노릇 하지 마세요”(Don't be a lion in your house.)란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속담이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자매간의 서로 배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감싸주는 아름다운 관계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행복이란 온 가족 구성원들이 뭉클한 감동, 뿌듯한 보람, 달콤한 나눔, 포근한 추억,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따스한 이야기와 기억의 작은 조각을 맞추어 나가야만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은 우리 가정 속에 뭉클한 감동, 뿌듯한 보람, 달콤한 나눔, 포근한 추억,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따스한 이야기들이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궂은일마다 하지 않고 나의 시간 나의 정성 나의 몸과 마음 아낌없이 내어놓은 부모님들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또한 부모님들에게는 자녀들이 건강하게 올곧게 잘 자라는 것이 부모님들의 보람이요 기쁨이기에 부모님에게 삶의 기쁨과 보람을 선사하고 있는 자녀들도 익명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기도 할 것입니다.

 

I

우리가 눈을 들어 이곳저곳 살펴보면 곳곳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형제 사랑(이웃 사랑)이란 뜻을 지닌 도시, 필라델피아에 네사람의 군목을 위한 교회가 있는데 그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1943년 2월 3일, 연합군 병력 수송선 도체스터호는 904명을 태우고 어둠을 가르며 항해하고 있었는데 독일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맞은 도체스터호는 얼마 가지 않아 물에 잠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군목 네 사람이 재빨리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구명조끼들이 모자자 받지 못한 병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네 사람의 군종 성직자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그 사병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네 사람의 군목들은 배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날 배에 타고 있던 904명 병사 중 605명이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순직한 네 사람의 군종 성직자들은 죤 워싱톤(John P. Washington) 신부, 클락 폴링(Clark V. Poling)이란 장로교 목사, 죠지 폭스(George L Fox)라는 감리교 목사 그리고 알렌산드 구디(Alexander D. Goode)라는 유대교 랍비였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 구명조끼를 가까스로 얻어 바다에 뛰어 내려 살았던 병사 ‘그래디 클락’이란 사병은 고향 필라델피아도 돌아가 내가 살아남은 것은 네 사람의 군목때문이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살아난 배경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큰 감동을 받았던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모금하여 지은 교회가 “네사람 군목을 기념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네 사람의 군종 성직자들이야말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II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서두에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질문을 한대서 시작합니다. 그 질문은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 교사란 전문적으로 율법을 연구한 사람으로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자격증을 취득한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격증을 가진 선생이 자격증이 없는 예수께 나아와 질문함으로써 율법(613조항)을 잘 알고 지키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율법 교사에게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율법 교사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레위기 19장 8절의 말씀,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율법 교사의 대답을 들은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에 대해선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웃을 유대 동족과 유대 나라에 사는 외국인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나라는 훗날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되어 살아갔는데 그때는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외국인들은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교 자체도 분열되었는데, 당시는 자신이 속해 있는 특정 지파의 사람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한 것은 굉장히 복잡하고도 곤혹스러운 질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가 예상한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비유의 이야기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에는 강도의 습격을 받아서 두들겨 맞고 모든 것 다 빼앗겨서 도와달라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지나쳐 가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 곧 성직자가 나오는데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척 외면하며 지나쳐 버렸고, 두 번째 사람은 당시 유대 나라에서 존경받는 최상류계층에 속하는 종교인, 레위족 사람인데 그 또한 눈감고 귀를 막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나오는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대하였고 그들과 대화도 하지 않았으며 사마리아 사람과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의 돈은 후원금으로도 받지 않았고 법정에서 증인으로도 채택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바쁜 걸음을 멈추고 강도 만나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한 후 그를 주막 곧 병원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돈으로 모든 치료비를 담당하였고 강도 만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돌봐주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이런 비유의 이야기를 들은 당시의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겝니다. 그들은 굉장히 당황하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라고 율법 교사에게 질문하는데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 곧 따뜻한 환대의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 질문하여 예수님을 덫에 걸리도록 함정을 파놓은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가만히 앉아 있는 명사형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동사형의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많은 교부들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 상처를 치료하고 안전한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가 데려다준 여관이야말로 교회의 원래의 모습이라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녀야 할 신앙의 DNA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이야말로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 모두는 곳곳에서 강도 만나 신음하고 있는 세상 속으로 달려가 생명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려내어 부수어지고 깨어진 생명을 온전한 생명되게 하는 일과 생명 하나 하나가 완전한 평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lIl

우리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말없이 보이지 않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 사람은 1884년에 첫 선교사로 한국에 온 감리교선교사 아펜셀러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장로교 선교사 언드우드와 함께 한국 땅에 도착한 후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아펜셀러 선교사는 1902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다른 배와 충돌사고가 있었습니다. 선교사 아펜셀러는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배를 타고 가던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이 바다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보자마자 바다로 뛰어들어 그들을 구한 후 탈진 상태가 되어 아펜셀러는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라'는 성경 말씀을 늘 강조하였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머나 먼 낯선 땅에 와서 자신의 생명을 던져 한국 사람의 생명을 살렸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선한 사마리아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한국 교회사에 나오는 김교신 선생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양정고보에서 역사학을 가르친 교사였고 1930년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김교신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에 성서를, 성서를 조선에”를 강조하면서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통해 신앙을 일깨우는 신앙운동을 펼쳐나갔으며 양정고둥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예수정신을 일깨운 교사였습니다. 그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하라고 하는 일본에 맞서 김교신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양정고등학교에서 쫓겨나 이것저것 하면서 힘겹게 살아갔습니다.

1945년 초, 일제의 막바지, 김교신 선생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노동자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 그는 글을 모르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신앙을 전하였는데 모든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를 참 스승으로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장티푸스가 발생하여 조선의 노동자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 나갔습니다. 아무도 장티푸스에 전염될까봐 그들애게 가서 도와주고 간호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교신 선생은 작업이 끝난 즉시로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장티푸스로 앓고 있던 동료 노동자들의 방으로 가서 소독을 하고 간호를 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쓰러져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김교신 선생이야말로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한국교회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한국교회 여전도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첫 여전도회가 1898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조직된 이래 이곳저곳 많은 교회에서 여전도회가 잇달아 조직되면서 읍, 면 등에 까지 조직되면서 서로 연합하여 활동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성미운동었습니다. 하루에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가락씩 모아 주일날 교회에 드린 성미운동을 통해 모은 쌀로 가뭄 홍수 화재 등으로 피해를 본 이웃과 사회에게 성미의 쌀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다수 배출되면서 기독교여성 사회단체인 YWCA(1923년)와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1924년)를 창설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전국 교회의 여전도회들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사회계몽운동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1928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조직된 후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을 아껴 모은 성미운동-절제운동 등으로 모은 모은 1천2백30원(당시 금 한 돈 2원, 요즘으로 환산하면 금 한돈이 40만원이니 약 5억원)으로 극빈의 가난한 이웃들과 학자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사업을 통해 민족의 지도자를 길러내었던 신앙의 어머니들이었고 해외 선교비를 부담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전도회야말로 얼굴이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말없이 봉사하였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금번 설 명절에, 온 가족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수고와 피로를 무릅쓰고 정성껏 명절 음식을 준비한 아내의 손길 혹은 어머니, 할머니의 손길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손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나 어머들이 만들어 온 가족이 즐겁게 먹게 하였던 음식은 ‘뭉클한 감동’, ‘뿌듯한 보람’, ‘달콤한 나눔’, ‘포근한 사랑’이 녹아져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사랑 듬뿍 담겨 있는 사랑의 조미료가 뿌려져 있는 음식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단순히 차려 놓은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그 음식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한 생명의 음식-생명을 살리는 음식, 모두를 기쁘고 즐겁게 한 음식이었기에 여러분들이야말로 이번 명절에 생명과 평화 넘치게 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III

일찍이 신학자, 서남동 목사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강도 만나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는 그 고통의 소리야말로 강도 만나 신음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요 긴급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선교적 요청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오갈 데 없는 거리 노숙인들, 극빈의 독거 노인들, 소년소녀 가장들, 오늘날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경제적 극빈으로 청년실업으로 신음하는 소리들 속에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탈북자들과 차별받은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들의 절규의 소리에도 우리 모두 귀 기울이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그들의 이웃이 되어봅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이기에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 어느 교회 대학부 청년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들의 헌신예배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기도를 마친 순간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강도 만난 사람이 예배당 한복판에서 나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만 예배 도중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중심으로 짧은 연극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성직자 역할을 한 청년이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치다가 그를 향해 기도하는 기도가 저의 마음을 아플 정도로 때린 적이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바빠서 그냥 지나갑니다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갈 때,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 사람을 돕게 해주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기도였습니다. 오늘날, 여기저기에서 나의 손과 정성과 나의 기도와 나의 작은 물질이 필요할 때, “오, 하느님, 저는 바빠서 그냥 지나갑니다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갈 때,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 사람을 돕게 해주소서”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봅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