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행 4:32-35, 부활절 둘째 주일, 2018년 4월8일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스웨덴 여성 언어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대표작 이름이 『오래된 미래』입니다. 헬레나는 1970년대 중반에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북부 인도 라다크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라다크는 작은 티베트라 불립니다. 환경은 척박했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다른 세상 문명과의 접촉 없이 고유한 전통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땅과 물과 날씨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헬레나는 인류의 미래를 라다크의 전통적인 삶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오래된 미래』로 정했습니다. 라다크가 헬레나에 의해서 서방세계에 소개되면서 서방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전통이 급속히 무너졌다고 합니다. 저는 라다크보다 더 오래된 전통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2천 년 전 기독교 초창기의 종말론적 원형이라 할 전통입니다.
원시 공동체의 생활 형태
오늘 설교 본문인 행 4:32-35절 이야기는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특이한 모습이 간략하게 서술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는 것은 인격의 심층에서, 요즘 말로 영적인 코드가 서로 통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원시 공산주의 형태를 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에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에게 가져왔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행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들 부부는 재산을 처분한 돈의 일부를 감춘 다음 일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가, 속임수가 들통 나면서 돌연사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 구성원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보도입니다. 34,35절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수준은 전반적으로 볼 때 낮았습니다. 노동자들, 하급 공무원들, 여자들, 심지어 노예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부자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부자가 재산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런 특성은 행 2:44, 45절에도 이미 보도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전통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안식년 제도를 설명하는 신 15장에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약간 길지만 오늘 본문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라서 공동번역으로 신 15:7-11절을 읽을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에 동족으로서 가난한 사람이 있거든 너희는 인색한 마음으로 돈을 움켜잡거나 그 가난한 형제를 못 본 체하지 마라. 손을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주어라. ‘빚을 삭쳐주는 해, 제칠 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며 인색한 생각이 들어 가난한 형제를 냉대하여 꾸어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마음에 다짐하여라. 그가 너희를 걸어 야훼께 부르짖으면 너희에게 죄가 돌아올 것이다. 시원스럽게 꾸어주어라. 주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너희가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사는 땅에는 너희 동족으로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차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너희 손을 뻗어 도와주라고 이르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난 자체는 불편할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이 더 근본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가난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 전체가 매도당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내침당하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가난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반사회적 현상도 가능합니다. 신명기는 그것을 가리켜서 ‘그가 너희를 걸어 야훼께 부르짖으면 너희에게 죄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훼손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훼손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손상당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특단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신자들이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원시 공동체의 삶을 실현해보려는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수도원에서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합니다. 가난하게 평준화되는 삶입니다. 수도사들의 방은 작고 소박합니다. 침대, 책상과 성경과 수도복이 모든 것입니다. 방에는 특별한 인테리어가 없습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노동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출가를 해야 하기에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수도원 외에 ‘브루더호프’와 같은 크고 작은 공동체도 많았습니다. 가족 단위로 참가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생활을 함께 하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공동체는 실패했습니다. 사유재산 포기가 인간 본성과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속사회에서도 그런 운동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공산주의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생각하고,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간다는 구호를 실제 삶에 실현시켜보려고 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의 세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옳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라다크의 전통이 이와 비슷합니다. 현실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오늘의 자본주의, 즉 시장주의 역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거의 시장 만능주의 체제 아래서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체제 아래서 교회는 자신들의 오래된 전통을 줄기차게 외쳐야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투쟁이 아니라 신앙적인 비전입니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투명한 통찰을 통한 신앙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사유 재산 포기
이런 신앙고백의 단초는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표피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재물도 원래는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연봉 1억 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저축하고 아파트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돈을 남겨 2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모았습니다. 재산 형성 과정에는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노력도 포함됩니다. 대학교수라고 한다면 학생들이 있었기에 연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업가라고 한다면 사업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돈을 모을 수 있는 겁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빛이 있고, 물이 있고, 박테리아를 비롯한 미생물이 도와주었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자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생명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인데 다른 것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상황이 이런데도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인간과 역사와 세상에 대한 착각이며 왜곡이고 고집입니다.
둘째, 모든 재물은 결국 없어집니다. 중간에 없어지기도 하고, 용케 운이 좋아서 늙어서까지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조금이라도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실제로는 자기 것을 끝까지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이유는 거기서 자기 삶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현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유달리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듯이 경제 수준은 꽤나 높아졌지만 삶의 질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저의 설교가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세상이 부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아무리 성찰해도 자기 재물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공관복음 세 군데에 다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영생에 관해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면서 모범적으로 살았던 그 사람에게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다음에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부자인 관계로 실망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마 19, 막 10, 눅 18장). 이게 인간의 실상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집과 통장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당황스러울 겁니다. 집은 저의 것이 아니라 집사람의 것이라서 제가 나눠줄 재산도 없긴 합니다. 그래도 적게나마 있는 것이라도 다 나눠주라는 요구는 저에게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영천의 집과 적은 돈과 책 등등, 모든 것을 저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잠시 빌려서 살다가 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미리 없어진다고 해서 속상해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건강을 포함해서 최소한 재물에 매달리지 않으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고집을 피우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부활 공동체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성찰을 구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 삶의 능력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더 근본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실을 단순히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이 근본 경험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더라.’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들은 당시 회중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재물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다면 우리가 생산해내는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고집을 피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고집을 피울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재물은 너무나 작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를 이해하려면 지금 우리의 생명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아주 실질적으로 꿰뚫어봐야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을 전투하듯이 살아갑니다. 거기서 조금만 위기를 느껴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는 생명 충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살이에서 이룬 것 중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보십시오. 자랑스러운 것의 정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대통령 직일지 모릅니다. 거기에 가장 큰 권력과 명예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두 명의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누렸던 권력과 명예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국가를 위해서 진정성 있는 역할을 다하고 명예롭게 퇴임하고 지금도 여전히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로 세상을 살기에 인생 전체가 총체적으로 잠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달리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이 극복된 생명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과 명예로부터도 지배당하지 않는 종말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런 부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부활 신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살이를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말로 그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말도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삶이 필요합니다. 일단 교회 안에서라도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생각의 전환과 그 실행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한다면 대한민국 교회의 빈부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수십억이나 수백억 원 이상의 헌금 수입을 올리는 교회가 한국에는 제법 많습니다. 그들이 재정의 반을 내어놓는다면 목사 생활비조차 충당이 안 되는 미자립교회 문제가 대부분 해결될 것입니다. 이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그 부활에서 은혜를 받는다면 당연히 교회 재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당장 실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시나브로 그쪽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세상이 교회를 새롭게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도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천년이나 오래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너무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나요? 여러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습니까? 그래서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미래이며, 더 나아가서 전체 인류의 미래입니다. 그 미래는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멘!
설교듣기: https://youtu.be/L5DAvqpbdjA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