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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고전 13:1-13)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에 대한 찬가입니다. 세계 문학의 역사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렇게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실천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다른 것을 말하는 중입니다. 본문은 고전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이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사랑을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결국 은사와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은사의 상대화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모든 은사를 상대화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세 묶음으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방언과 천사의 말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은 이상한 언어들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방언입니다. 서울사람에게는 제주도사람들의 말이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일상적인 외국어나 심한 사투리 같은 방언만이 아니라 언어 구조를 넘어서는 신비한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런 소리를 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교도의 예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아주 고도의 정신적 상태에 빠질 때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13:1)

둘째는 예언과 비밀과 지식과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를 방언보다는 나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에 속하지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섯 마디 전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고전 14:19)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신유와 축귀 능력이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많은 신자들이 원하는 그런 은사들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것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고전 13:2)

셋째는 구제와 불사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극한의 자기희생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일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기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남을 돕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말은 순교를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능력도 은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나눠주고 살신성인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3:3) 위에서 언급한 은사들은 모두 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은사들도 그것 자체로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선 여기서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은사들을 부정하는 은사 냉소주의는 교회 안에서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은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봉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은사입니다. 청소,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등, 모든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우리에게 더 풍요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귀한 은사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화할 뿐입니다. 은사들은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목사로 살 수 있고,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내 생일에 꽃다발을 사올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그게 가능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런 일에 더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젊었을 때 빼고는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변명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기만족에 빠지기 위해서 얼마든지 그럴듯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은사가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전 13: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은, 즉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예언이 성취되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때 이런 신비로운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지식(그노시스)은 하나님에 대한 감추어진 것을 아는 힘입니다. 철학, 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등,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역할이 없습니다.

은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몇 가지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와 같으며, ‘희미한’ 것입니다. 특히 어린아이 같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고 실감이 가기도 합니다. 고전 13:11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을 비롯한 은사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완전히 걸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그 결과는 분쟁과 파당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서로 마음이 찢겼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인격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고 과도하게 은사중심으로 작동되는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이 해야 할 일만 강조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은사중심주의입니다.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희미한 것들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의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끝장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은 누구인가?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모든 가치 있는 은사를 상대화한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사랑만이 절대적이며,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고전 13:4-7절까지 묘사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총 15개 항목입니다. 사랑을 묘사하는 헬라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모두 동사라고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머리에서 맴도는 사유나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겠지요.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전 13장을 오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오해 말입니다. 4-7절이 묘사하는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동기에서도 완전힌 순수해야만 가능한 사랑을 누가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능력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듯이 사랑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스스로 우리에게 임할 뿐이지 우리가 사랑을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사랑에 실패한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15가지 사랑의 속성이 우리 삶에서 반복해서 훼손됩니다. 4절이 언급하는 다섯 가지 항목만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참는 게 아니라 너무나 쉽게 화를 냅니다. 온유한 게 아니라 거칩니다. 시기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시기심에 불탑니다. 자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교만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교만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사랑과는 정반대로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늘 실패합니다.

성인들은 좀 다르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겠지요. 성인들은 이타적으로 살았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그래도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어머니일 겁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성인들과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사랑이 아무리 지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모든 소유로 남을 구제하고, 순교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바울의 말은 빈 말이 아닙니다. 성인들과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귀한 마음과 행위들은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로는 사랑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각종 은사는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으로는 온전한 것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껏 해봐야 아름다운 퍼즐 한 조각에 불과한 사람이 어찌 퍼즐 전체 그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욕심을 부릴 때마다 절망감만 느낄 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사랑의 능력이 없다면 아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해야 할까요? 은사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은사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이게 어려운 질문입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을 찾기도 힘듭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오죽 심각했으면 바울이 은사 문제를 세 장에 걸쳐서 길게 설명했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삶의 능력과 영적 수준에 따라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신앙적인 방향은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온전한 것은 속으로 숨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목사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설교라는 언어와 문자에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설교라는 형태만 봅니다. 이렇게 형태에만 머물러 있을 때 설교에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 하는지를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다면 이를 구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것을 부분적인 영역에 두고, 온전한 것을 온전한 영역에 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에 의존시킨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교회봉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것입니다. 교회봉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이것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봉사 자체를 하나님이라고 믿으니까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온전한 것에 대한 시각이 강렬하지 못하니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의 결론인 고전 13:13절에서 온전한 것을 고린도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들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2절이 말하는 산을 옮길 만한 능력과는 다른 온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런 신뢰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계시하시는 그 때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부분적인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손상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영혼에 손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처럼 무례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종말과 현재에 우리 삶의 참된 능력이십니다.(주현절 후 넷째 주일, 1월31일)

고린도전서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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