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람
마 5:38-48, 주현 후 일곱 번째 주일, 2017년 2월19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요즘 젊은이들은 사이다 발언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사이다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발언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콜라나 맥주가 더 낫던데요. 예수님의 발언 중에도 그런 표현에 어울리는 게 적지 않습니다. 막 2:27절에는 안식일 논쟁 중에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셨습니다(마 21:13).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큰 위로가 되는 발언도 종종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와 같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와 달리 뭔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발언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옵니다.
악을 대적하지 마라(?)
마 5:39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치욕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뺨을 때리는 겁니다. 상대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오른편 손등을 사용해야 합니다. 대개는 한쪽 뺨을 맞는 순간에 득달같이 대들어서 치고받을 겁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40절은 이렇습니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가난한 사람이 끼니가 없어서 속옷을 저당 잡혔다고 합시다. 돈을 갚지 못하니까 이자가 자꾸 늡니다. 결국 채권자가 이 사람의 겉옷까지 욕심을 내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속옷보다 겉옷이 더 중요했습니다. 밤에 그걸 덮고 잠을 잤기 때문입니다. 겉옷까지 줘버리면 이 사람은 방안에 갇혀서 지내야 합니다. 41절에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십 리를 동행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현지 주민들을 아무 때나 강제 동원해서 길을 안내받거나 짐 나르는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고 형장까지 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길 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간 적도 있습니다(마 27:32). 이런 일을 당하면 대개 ‘재수 없네.’ 하겠지요. 42절은 이렇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반복되는 민폐를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강요받는 거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이나 숙명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게 들립니다.
위에서 열거된 네 가지 행목은 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큰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로 나온 겁니다. 대적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최선이겠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다툼을 피하는 게 낫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남북관계에서도 북한이 요구하는 것이 억지적인 거라 하더라도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악에는 저항해야 옳은 겁니다. 실제로 저항해야만 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더 무시당하게 되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는 세상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악을 무조건 묵인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예리하게 비판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그들이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은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는 뜻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배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 기독교인들을 독자로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래로 유대교의 강화된 율법주의로부터 압박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축출해버리겠다는 압박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유대교 당국의 요구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거부하면 유대교라는 일종의 ‘핵우산’에서 밀려나고, 결국 로마 제국의 박해에 직접 부딪치는 겁니다. 마태는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대목인 마 5:17절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자신들이 처한 입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이 율법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는지를 마태는 5:21절 이하에서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거기에 오늘 설교 본문이 들어 있습니다.
마 5:38이 인용한 모세의 율법은 출 21:24절과 레 24:20절 등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입니다. 이 명제는 하무라비 법전에도 나옵니다. 이 명제가 겉으로만 보면 아주 과격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과잉 보복의 제한을 가리킵니다.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똑같이 한 대만 때려야지 두 대를 때리면 안 됩니다. 이런 제한을 두지 않으면 힘 센 사람이 더 큰 보복을 감행할 것이며, 당한 사람은 억울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게 되어 세상이 혼란에 빠져듭니다. 이 명제는 기본적으로 약자들을 돕기 위한 법적 장치인데,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이 명제를 밀고 나갔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네 개 항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의 삶에서 지키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지 못할 겁니다.
마 5:43절에는 모세의 또 다른 명제가 인용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여기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레 19:18절입니다. 이 구절에 실제로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 139:22절에는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쿰란 문서에는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 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약간씩 뉘앙스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최선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훨씬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 명제를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봅니다. 실제의 삶에서 원수는커녕 친구 사랑도 어렵습니다. 같은 교회의 교우를 사랑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완전, 사람의 완전
예수님은 원수 사랑의 신학적인 근거를 45절부터 설명하셨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다르게 보이지만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게는 다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순종적인 자식만이 아니라 말썽 피우는 자식도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적으로만 살면 세리나 이방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수사랑이 규범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기독교의 고유한 해석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형식에 떨어져 있는 유대교와 달리 율법의 본질에 집중하고 있는 기독교가 율법을 완성한다는 주장입니다. 이어서 마태는 48절에서 다음과 같은 엄청난 예수님의 말씀을 결론으로 삼았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것보다 더 파격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완전하라.’는 명령은 정말 부담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에 묶이면 우리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십시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당시의 풍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당장 세리 일을 그만두라고 닦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도덕선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많은 행동 기준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우선 ‘완전’이라는 단어에 오해하지 말아야합니다. 이 단어는 아무런 흠 잡힐 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살아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서 전적으로 열린 삶의 태도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삶의 열린 태도는 쉬운 것처럼 들려도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는 자기가 열려 있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지만 닫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지식 유무나 재산의 많고 적음, 사회적 지위의 고하와 상관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절대화합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가족관계도 이런 닫힌 삶의 중요한 형식입니다. 가족 관계에 퇴행적으로 종속되어서 가족을 넘어서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도 하고 실력도 쌓고 자기를 성취하는 건 필요합니다. 그게 폐쇄적으로 작동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만약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다면 삶을 전혀 새롭게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삶이 훨씬 깊은 데까지 나간다면, 쉽지 않겠지만 원수 사랑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를 실질적으로 개방할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와 교육학자들이 각각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공동체 놀이를 통해서 친구들과 소통하는 훈련을 쌓으라고 조언할 수도 있습니다. 장애시설을 방문해서 봉사하는 게 자기를 개방하는 공부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최저생활비 보장을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다 참고하면 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나라 안에 사는 우리 모두는 서로 진정한 소통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관점에 따라서 다른 대답이 나올 겁니다. 이런 문제는 여러분들이 대략 아는 거고, 또한 제 전문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선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서 전적으로 자기를 개방할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생명 통치입니다. 창조의 능력이고 종말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고 종말에 완성된다는 사실이 화염처럼 우리 영혼을 휩싸면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겠습니까. 더 이상 자기에게 갇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게 숨 쉬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물론 살아가는 데는 숨 쉬는 거 말고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긴 합니다. 오락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락은 즐기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숨 쉬기만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저는 숨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드린 것이지 실제로 그것만으로 삶이 다 해결된다는 게 아닙니다. 숨에 집중하듯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집중하는 사람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즉 거기에 집중하라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도 여전히 자기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해가 갑니다. 저 스스로도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더 나가서 모든 세상과 자연을 향해서 늘 열려 있는 게 아닙니다. 종종 공연한 것으로도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답답하게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작은 염려로 잠을 불면에 떨어지곤 합니다. 살아있는 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 근본 문제인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의 하나는 자기 축소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걸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축소는 자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게 완전히 휩싸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한히 축소됩니다. 그것의 절정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우리가 이룬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킵니다. 무(無)가 됩니다. 오늘밤에 죽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더 이상 돈을 벌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겁니다. 더 궁극적으로 지구가 내일 붕괴된다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국가들이 원수처럼 싸우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비약된 거라고 생각되면, 지금 우리 각자가 얼마나 작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먼지와 같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제가 금년에 64세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신학대학교를 다니던 70년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20년도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곧 죽습니다. 저는 지금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미미해서 거의 없는 것 같은 우리의 실존을 실질적으로 뚫어본다면 자신 안에 갇히지 않을 겁니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 더 나가서 작은 사물을 향해서도 자신을 엽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삶은 그야말로 축제로 승화됩니다. 거기서 원수사랑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본문인 마 5:38-48절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도의 윤리 지침에 대한 요청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그 말씀은 율법처럼 삶의 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자기만의 세계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살게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처럼 완전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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