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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요동치는 요단강 앞에서 (수 3 : 1 - 17)

▣ 들어가는 말

  - Nothing...... Everything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은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기 위해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치열한 다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종교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구원은 무엇인지, 삶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깊은 통찰을 줍니다.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과 대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두 장면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하나는 하틴 전투의 참패 이후에 티베리우스가 주인공인 발리앙(올랜도 블룸)에게 한탄을 하는 장면입니다.

"나는 평생을 예루살렘을 위해 헌신했어.

처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알겠군. 우리는 땅과 돈을 위해서 싸웠던 거야. 수치스럽군..."

“예루살렘은 이젠 없네.

(가망 없는 전투엔 참가할 수 없으니)

난 키프로스로 가네. 함께 하겠나?”

   이에 발리앙은 거절하며 예루살렘을 지키겠다고 대답하지요. 티베리우스에게 예루살렘은 이제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는 곳이었지만, 발리앙에게는 여전히 목숨을 걸어도 좋을 그 무엇이었던 것이지요. "신께서 자네와 함께하시길 비네."

"그분은 더 이상 내 곁에는 없으시니!"

   

    또 하나의 장면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의 열세에도 이슬람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살라딘의 공격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켜내던 발리앙은 살라딘과 협상을 합니다. 예루살렘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모두의 생명을 보존해 달라는 것이지요. 양편의 군대가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가운데서 만난 두 사람. 발리앙이 살라딘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엇이죠?"

"아무것도 아니지(Nothing)… 모든 것이기도 하고(Everything)!"

 

   이 말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와 성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의 삶과 구원, 신앙,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함축적인 질문과 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찾지 않는 이에게 신은 말 그대로 Nothing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겐 Everything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신비하지 않나요. 누군가에게는 하찮기 그지없는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신앙에 대해 너무나 잘 표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신앙은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가 아닐까요.

 

 

▣ 마중물 / 물음들

  - 출애굽 → 광야 → 가나안 입성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은 430년 동안의 이집트 노예의 삶에서 탈출합니다. 말 그대로 출-애굽한 것이지요. 출애굽의 역사적 시기는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니 기원전 1200년대로 추정됩니다. 저는 여기서 그 역사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성을 떠나서 성경이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실에 초점을 맞춘 과학서나 역사서가 아니니까요. 성경은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삶에 대한 통찰과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출애굽 사건을 인간의 노예 상태를 상징하는 이집트(400년)에서, 자유를 향한 인간의 투쟁,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봅니다. 노예 상태인 인간에서 자유인으로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진정한 삶과 구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삶의 주인, 주체가 되지 못한 인간이 삶의 의미나 구원을 논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출애굽의 과정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진정한 자유인(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듯 인간의 성숙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광야의 40년은 노예의 상태, 물리적 환경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남아 있는 노예의 습관을 떨쳐내는 인간의 투쟁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곧바로 주체로서의 인간, 삶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 완성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광야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은 인간이 노예근성을 버리고 주체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삶의 주체, 주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게 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예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인으로 사는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삶의 주인공, 자유인, 주체가 되었으나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고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너무나 불확실하고 고달픈 광야와 같은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와 주체적 삶을 넘어 어떻게 구원, 완성에 다다를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출애굽의 과정을 거쳐 광야의 시기를 지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전 과정이 인간의 삶의 과정이나 유형, 혹은 인간의 성숙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 사건 속의 사람들

   광야의 40년을 보내며 이전 세대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애굽 시절을 겪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입니다. 노예로서의 인간의 삶이 끝나고, 완전히 다른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이 출현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 지도자 역시 새로운 인물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했던가요. 시대가 변하고 시대정신(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이 달라졌으니 그에 따른 지도자와 지도력 역시 달라져야겠지요.

   어쨌든 여호수아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가 느꼈을 부담감과 책임감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전임 지도자와 끊임없는 비교를 당했을 것이고, 도발적이고 자기주장이 분명한 신세대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요. 아울러 그가 감당해야 하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역사적 과업, 전쟁, 갈등, 투쟁, 권력투쟁… 앞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은 또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온갖 기대와 탐욕들, 두려움과 망설임, 혼돈과 유혹들… 엄청난 긴장과 불안 등이 혼재해 있었을 것입니다. 자유인의 삶을 왜 광야의 삶으로 표현했을까요?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는데, 또다시 노예의 상태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사람들의 지배에서 신의 지배로 옮겨가는 것일까요? 그들이 기대했던 가나안에서의 삶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 그리고… 우리

   그리고 우리는 또 어떤 물음과 생각 앞에 있을까요.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가나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티베리우스의 깨달음과 같이 이제껏 싸워왔던 것이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땅과 돈’을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신께서 자네와 함께하시길 비네.” “그분은 더 이상 내 곁에는 없으시니!”로 결론 내려야 할까요. 예루살렘은 결국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고요?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해 온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비록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진정한 자유인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주체자의 삶을 넘어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의지가 있는 걸까요? 그 가나안의 정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그 과정을 노예의 삶, 주체자의 삶, 구원과 해방의 삶으로 정의해 본다면, 그 어디 즈음에 우리는 있는 걸까요? 자유인으로의 삶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는 가나안은 지금 우리에게 Nothing인가요? Everything인가요?

 

  - 요단을 건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광야의 시대가 끝나고 가나안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인의 삶이 구도자의 삶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거칠고 고통스럽던 광야의 시간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정복의 시간은 얼핏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요단을 건넜으나, 그들 앞에 펼쳐진 삶은 광야의 삶 못지않게 더 치열하고 더 고통스러운 투쟁을 동반한 삶이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유인으로의 삶과 구원을 사는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광야의 삶이 주는 목마름과 외로움과 허허로움을 넘어 새로운 땅으로 들어갔지만 완전한 정복을 위해서는 여전히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견디고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요단을 건넜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삶의 목적과 의미가 달라졌고,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으나 질적으로 다른,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순간, 요단을 넘는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고민해 보시고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을 품어보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요단 앞에서 3일 동안 유숙(여장을 풀고 묵다)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결하게 합니다. 이것이 요단을 넘는, 구원의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구도자의 삶의 태도는 온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그러한 태도에 의해 물건도 명품과 기성품의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무엇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상을 예배드리듯 사는 것이 구원의 삶의 모습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삼 일을 보냅니다. 요단강을 바라보는 모두가 알았을 것입니다. 저 강을 건넌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그들의 모든 조상이 그리도 바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의 삶으로는 누구도 넘지 못했던 것이기도 하지요.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우리가, 인류 모두가 근원적인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데 요구되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요단에 들어서라”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인간이 광야의 삶을 넘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종교 생활을 하며 그토록 바라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언제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던 그 임계점을 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 요단강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좌절해 왔던가요. 되돌아보면 한때 뜨거웠던 때가 있었지요. 신앙생활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그저 기쁘고 감사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혹은 성경의 말씀이 너무나 달고 좋았던 때가 있었지요. 하나하나의 성경의 구절들이 모두 다 나의 가슴에 와닿던 때가 있었습니다. 혹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늘 미소지으며, 누군가를 대가 없이 도와주고 남몰래 봉사활동을 하고 그러면서 알아주는 이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무너졌고, 무뎌졌고, 냉랭해졌고, 무덤덤해졌고, 그저 일상의 습관처럼 되어버렸지요. 요단강 앞에서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일까요. 두려웠던 것일까요. 과거의 삶이 그리웠던 것일까요.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은 무엇일까요?

 

 - 언약궤를 메라!

   오늘 성경은 요단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은 창과 칼, 방패가 아니라 언약궤를 메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언약궤는 모세의 십계명을 넣어둔 것으로 언약, 약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약속.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영원히 함께 있어 하나님의 되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지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기도 하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약궤를 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삶의 난관 앞에서, 도약 앞에서, 머뭇거릴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언약궤, 즉 ‘믿음’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앞에 섭니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용기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그냥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믿음, 신념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상대가 나의 마음을 받아줄지 그렇지 않을지 알지 못하지만, 사랑을 믿음으로 고백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어깨에 메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넘실거리는, 삼킬 듯 요동치는 강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발이 물 가에 잠기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릿속에 있는 믿음, 입술에 맴도는 고백은 소용이 없습니다. 물속에 발을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자 요동치던 요단강의 물은 멈춰 서게 됩니다.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가릅니다. 모세 개인이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안내 아래 백성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지도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도자 혼자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 나가는 말

  - 나는 삶의 주인인가?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의 삶을 살고 계신가요? 정말 우리는 자유인, 삶의 주체로 살고 있을까요. 심지어 우리의 욕망마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요단을 건너기 전에 먼저 우리는 노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체가 아닌 삶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삶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떨 때 가장 자유롭고 당당한가? (ex – 김어준의 명품 ‘보스’ 이야기 “지금 당장 행복하라”)

 

  - 주인 된 삶을 넘어

   놀랍게도 성경은 주인 된 삶 너머의 삶을 보여줍니다.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가나안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랍고 아이러니한 것은 그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오히려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짐들(관념, 시대정신, 욕망, 자아, 사회적 요구…)을 벗어버리라고 해놓고서, 그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해 놓고서 이제 와서 다시 짐을 지라니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내 짐은 가볍다”고 말입니다. 짐을 지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부여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짐은 ‘언약궤’라고 합니다. 인간을 완전히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만드는 것은 짐을 벗어버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짐을 지는 것이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죽음마저 굴복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삶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함께 가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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