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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우리는 자유로운가? (갈 5 : 1 - 15)

2025년 9월 7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qxyqd3nmM4U?si=zOfFM9keiugzdU9P

▣ 들어가는 말

- 우리는 자유로운가?

“우리는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며 20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 그는 감옥에서 『감옥수고』 혹은 『감옥노트』라 불리는 방대한 책을 저술합니다. 그의 사상에서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변화는 경제적 혁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와 권력은 단지 물리적, 경제적 억압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수준에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배 계층은 단지 물리적으로 노동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 믿음, 가치관을 통제한다.” 그는 투옥된 지 11년에 감옥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가 “내가 떠난 후, 내 사상은 살아남을 것이다”였습니다.

그람시의 이야기는 자유를 얻지 못한 혁명가의 비극적이면서도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외부적인 자유를 얻지 못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사상가로서 계속해서 문화적, 사회적 변혁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도 어떻게 사상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자유는 외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그람시의 삶은 잘 보여줍니다. 그람시의 사상적 자유는 그가 살던 시대와 사회를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싸움으로 여겨집니다. 감옥에 가두어도 정신적인 자유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유’야말로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숭고한 가치가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를 바탕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가?’ 나아가 ‘교회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어쩌면 그 무엇보다 더 교묘히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한 번이라도 정말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던가요. 신앙은,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유로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헌금과 선행과… 온통 우리를 옥죄는 것들로 가득하지 않은가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신앙은 자유인가요? 짐인가요?

 

▣ 역사/사회적 상황

-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

‘갈라디아’는 ‘갈리아(켈트)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로, 현재 터키의 중부 내륙 고원지대를 가리킵니다. 갈리아 사람들은 원래 유럽 켈트족의 일부로, 전투적이고 부족 중심적이었으며, 로마와 갈등과 충돌을 반복했습니다. 이들이 일부 소아시아에 정착하여 “갈라디아”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곳에 바울의 선교로 교회가 세워진 것이지요. 이곳은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등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사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라디아 교회는 자연스럽게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었고, 따라서 율법과 할례 문제가 갈등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할례와 율법 준수가 필요하다”라고 가르치면서 교회가 혼란에 빠져듭니다. 새롭게 신앙을 가지게 된 이방인 신자들은 자칫 방종으로 흐를 위험이 있었고,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 신자들은 은혜보다 율법을 더 중요시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갈등/문제의 뿌리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표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해도, 할례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던 것이지요. 둘째, 사회적 압력 문제입니다. 유대교는 로마 제국에서 합법적 종교였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리적 불안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 불확실하게 들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율법과 규율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 성서의 응답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할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정체성의 상징이었고, 사회적 배타성의 뿌리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복음의 본질(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를 받았는데, 왜 다시 옛 멍에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 바울의 대응

- 제국에서의 자유

바울 당시 헬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는 주로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 로마의 시민권을 얻어 제국의 정치적 법적 권리를 누리는 것, 그래서 억압에서 벗어나 어떤 간섭이나 제재를 받지 않고 통행의 제한 없이 제국의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요.

당시 노예가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곧 “법적으로 인격이 인정된다”라는 뜻인데,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법정 해방”은 주인이 노예를 데리고 재판관 앞에 서서, 상징적인 지팡이로 노예의 어깨를 치며 해방을 선언하는 것. 둘째, “인구조사 해방”은 인구조사 시 주인이 노예를 자기 재산 목록에서 제외해 자유인으로 기록하는 것. 셋째, “유언 해방”인데, 주인이 유언장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음을 명시하는 경우입니다. 이들을 ‘해방 노예’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주인과 후견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즉,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었지요.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고,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며, 사업도 가능하지만, 정치적인 권리(투표권)는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자유는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은 당시 강력한 “법적 특권”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시민이다”(행 22:28)라고 한 것도 이 맥락이지요. 시민권자가 누리는 권리로는 고문 없이 정식 재판받을 권리, 황제에게 직접 상소할 수 있는 항소권(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처럼), 십자가형 같은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지 않을 권리, 투표할 수 있고, 출마할 수 있고, 군복무시 장교로 진급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었습니다. 이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시민권자 부모에게서 태어나거나, 군사적 공로 등으로 황제나 원로원에 의해 부여받거나,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황제의 특혜로 시민권을 사거나(행 22:28에서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얻었다”라는 백부장의 말)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자유, 혹은 자유인이라는 말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철저히 사회적 법적 차원에서 자유와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 바울의 자유

바울은 기존의 “자유”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를 말합니다. 먼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율법 준수(특히 할례, 음식 규례 등)”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종교적 규율과 관습이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율법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엄청난 말을 쏟아냅니다. 바울의 자유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제국이나 법이나 제도, 문화, 심지어 신앙생활이라 불리는 율법에서마저도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탁월한 점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는 것입니다. 자유라 하면 모든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라고 생각할 때, 바울은 진정한 자유는 그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신의 형상은 자유가 아닐까요. 완전한 자유는 신만이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자유를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신만이 진정한 신인 것이지요.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정말이지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 자유란 무엇인가?

- ‘자유’에 대한 신학적 해석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가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지요. 인간은 그토록 자유를 꿈꾸지만 동시에 자유가 얼마나 무거운 무게인지도 우리는 역사적,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동반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힘겹게 벗어났지만,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2) 자유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어린아이일 때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보니 자유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움을 실감하게 되지요.

이 자유는 신앙에서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불리며, ‘서방 교회의 기둥’, ‘은혜의 박사’로 불렸던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자유의지는 죄를 짓는 능력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말합니다. 멋진 통찰이지요.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기 행동을 선과 악으로 판단할 수조차 없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의지가 약하고 탐욕을 이길 수 없어, 자유의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여길 때, 그러한 생각을 뒤집어엎어, 자유야말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이라는 선언을 한 것이지요.

‘신학자 중의 신학자’, ‘보편 박사’로 불리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젊었을 때, 말수가 적고 덩치가 큰 탓에 친구들이 그를 “멍청한 황소”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이렇게 말했죠. “지금은 벙어리 황소 같지만, 훗날 그의 울음소리가 온 세계에 울려 퍼질 것이다.” 보편 박사라는 말은 그의 가르침이 보편 교회 전체의 신학적 기준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스승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이성이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은총 없이는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은총이 없이는 선을 향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자유는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성의 힘, 능력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 것이지요. 이성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이끌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독일의 예언자’, ‘성경 박사’라 불리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 당시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가 루터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포도원에 뛰어든 멧돼지”라고 불렀는데, 이후 루터파는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해석 역시 탁월합니다.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내 아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을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복음 이해를 가장 잘 담아낸 저술입니다. 칼뱅, 웨슬리 등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도 갈라디아서 주석을 루터 신학의 정수로 받아들였고, 종교개혁 신학의 전형적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루터에게 자유는 교황권과 제도적 권위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있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섬김의 자유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는 선언을 루터는 깊이 받아들여, 자유를 개인적 권리나 자율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섬김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전 신학이 자유를 “죄나 악습에서의 해방” 중심으로 보았다면, 루터는 자유를 율법적 의무·강제와 종교적 속박에서 해방으로까지 확장시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폴 틸리히의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자유를 “자기 결정”으로 봅니다. 내가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열린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 속에는 늘 다른 측면이 따라옵니다. 성공의 가능성뿐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 생명의 가능성뿐 아니라 죽음의 가능성, 의미의 가능성뿐 아니라 허무의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유는 우리를 해방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라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무의 심연”입니다. 자유는 스스로 무(無)를 드러내고 자기 파괴적 불안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자유가 무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 바깥의 궁극적 존재 근거(하나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은혜에 자신을 맡길 때, 자유는 허무가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긍정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유는 무(無)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성취된다”라고 한 것이죠. 이때 자유는 단순히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실존”이 됩니다. 틸리히가 말한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는 바로 은혜 안에서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고, 그때 진정한 자유가 성취된다고 본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종의 멍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 자유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얽매거나 구속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심지어 그것이 율법이라 할지라도. 부모나 사회의 관념이나 그 무엇에도 묶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행위 교리를 만들어 내거나 지키는 자는 모두 복음의 반대자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리를 무익한 것으로 만든다.” “내가 나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호의나 영생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내 죄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해 절망한다면, 그리스도를 아무 유익이 없는 분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루터, 『갈라디아서』) 그리스도는 할례(율법, 행위)를 신뢰하는 자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은 폐지되었고,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 오직 사랑이 있을 뿐

바울은 율법마저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인간을 정죄하고 속박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때, 자유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급진적인 선언이었고, 심지어 “신앙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단순히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서는 해방입니다.

틸리히가 말하듯, 인간의 자유가 자기 자신만을 붙들려 할 때 그것은 허무와 불안으로 끝나고 맙니다. 바울은, 자유가 “육체의 기회”(자기만을 위한 자유)로 쓰일 때 그것은 파괴적이라고 말합니다. 틸리히는 자유가 은혜 안에서만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유가 사랑 안에서만 온전히 성취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자유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타자를 향할 때 비로소 참된 자유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는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태도이고, 바울의 “서로 종노릇”은 사랑 안에서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실천입니다. 자기만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를 넘어선 자유입니다. 자유는 자기중심적 방종이 아닌, 사랑으로 타자를 섬김으로써 완성됩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있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기독교인은 모든 것 밑에 있는 봉사하는 종이며, 모든 이에게 예속된다.”(루터)

이 역설이 참된 자유의 신비입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사람이 진정 자유로울 때는 오직 사랑할 때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와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서 자유롭기를, 자유 속에서 사랑하시길 기도 합니다.

 

주님,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자유가 이웃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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