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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사 55:1-13)

 

 

이사야 55장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 당했습니다. 바벨론은 당시 근동의 패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국가입니다. 지금의 미국을 생각하면 됩니다. 바벨론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프로 씨름선수와 중학생 씨름선수와의 시합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총체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다윗이 수도로 삼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예루살렘은 회복 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귀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바벨론 관리들이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지도에서 사라진 겁니다. 그런 세월이 5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근동 국가들의 세력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위상은 떨어지고, 신흥 제국 페르시아가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군주 고레스가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해방 받을 날이 속히 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해방의 메시지가 사 55: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들입니다. 목마른 자들은 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포도주와 젖을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b) 3절에서는 다윗 시대를 다시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상향으로 그리워하는 시대가 바로 다윗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에서 온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앞으로 인근 지역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이라고 했습니다.(5a절)

이사야는 오랜 포로생활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좋은 일들이 일어나니까 즐거워하라는 말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특별한 역할을 하게 하신 이는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5절)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역사에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진술을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나열되고 마는 역사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겉으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씨앗에서 풍요로운 열매를 내다보는, 모래 한 알을 통해서 우주 전체를 내다보는 시각과 비슷합니다. 이럴 때만 우리의 신앙을 살아납니다. 거꾸로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즉 우리가 무언가에 쫓기거나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또한 인간적인 갈등으로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풍랑을 만난 작은 배처럼 휘청거리는 이유는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만 몰두한 채 그 너머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참된 안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성서기자들은 바로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분만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이사야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6절)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언제일까요? 그가 가까이 계실 때가 언제인가요? 사실은 그 ‘때’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호흡처럼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십니다. 그는 영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숨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있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영혼이 깨어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 계기는 개인적으로 다 다릅니다. 가족이 죽었을 때나 힘든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가 그런 계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바벨론 포로 귀환을 예감할 때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계기가 주어진다고 해서 모두 여호와를 찾거나 부르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봅니다.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아무리 결정적인 계기가 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사야의 이 진술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때’가 아니라 오히려 ‘찾으라.’와 ‘부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말을 단순히 격식을 갖춰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이 그런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혼의 촉수가, 즉 우리의 존재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이고, 그가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베토벤 같은 사람은 감옥에서도 역시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혔을 겁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영감이 가득한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다는 말을 어렴풋이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알기는 좀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먼저 ‘영혼’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생명의 가장 심층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다는 말은 생명의 가장 심층적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차원은 단순히 심리나 인격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나 어떤 취향과도 다릅니다. 그것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꾸로 그것이 안정되면 모든 부분이 안정되는 생명의 근원을 말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사실에 눈이 활짝 열립니다. 마치 마른 건초더미에 불이 붙듯이 하나님 광휘에 존재 전체가 사로잡힙니다. 이런 것들은 그의 영혼이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서이야기는 모두 영혼의 떨림에 대한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문장을 말한 사람들의 영혼을 되짚어보십시오. 그는 태초를 생각했습니다. 우주의 시작,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늘과 땅을 중심으로 한 우주를 창조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영혼이 떨리는 경험을 했겠지요. 신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묘사합니다. 이 환상을 전한 사람의 영혼을 되짚어보십시오. 그는 세상의 마지막을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이후까지 나갑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이 이루어질 그 순간을 가리켜 주님의 재림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떨리는 경험을 했겠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성서의 증언에 영혼이 떨리시나요? 아니면 남의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지금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태초와 종말에 마음을 둘 여유가 없으신가요? 저는 지금 일상이 무의미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일상을 소홀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 일상에 은폐의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부모와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용돈을 얻습니다. 용돈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용돈의 많고 적음에만 매달려서 투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용돈을 주는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부모에 대한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면 자녀들은 용돈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에게만 영혼을 집중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를 찾는 것이며, 부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본문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을 집중시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생각은 계획을 말하고, 길은 실천을 말합니다. 사람의 계획과 실천이 하나님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사람은 땅에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은 다릅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사야 55장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 포로생활이 5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긴 포로생활에서 그들의 영혼까지 바벨론 제국의 힘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강점기 말에 이르러 친일로 돌아선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제 강점이 끝날 거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일반 대중만이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도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기원전 6세기의 이스라엘이나 19세기의 한민족만이 아니라 21세기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우리가 지금 겁을 내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가요? 소유의 힘입니다. 물리적인 힘과 권력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지금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패배주의입니다. 기성세대만이 아니라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 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지를 제가 모르는 게 아닙니다. 외모 지상주의와 학벌주의가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모두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교회 문제로 좁혀 보십시오. 교회성장주의는 오늘 한국교회의 절대이념입니다. 그런 이념은 매력적이어서 교회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계획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통렬하게 인식할 때만 우리는 역사 패배주의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실현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이 해방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었을까요?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바벨론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오랜 패권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서 여러 소수 민족들이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이스라엘 포로들도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승리에 찬 귀환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피폐해진 지역경제와 민심이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으로 평가했던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재건에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일반 제국의 왕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5백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사람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나사렛은 별 볼 일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평범한 목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사람의 세상 경험만으로 본다면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3년 가까운 유랑 설교자 활동을 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저주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를 대신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의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여기서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람들의 생각과 길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였습니다. 우리와 인류는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억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절기를 지내고 있으신가요? 아무도 고난과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불안해하고, 불평하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만, 결국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고난에 질적으로 다르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과 그 빛이 비쳐오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순절에 바로 그 하나님을 어찌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사순절 셋째 주일, 3월7일)

이사야 5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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