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굵은 대목만 뽑는다 하더라도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심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 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그들이 부도덕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음행과 교우끼리의 송사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원래 그리스의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서 옛날부터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돈이 많이 모이면 결국 소비와 향락 문화가 꽃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고린도에는 요즘의 올림픽에 버금가는 스포츠 제전이 열렸고, 그리스의 온갖 신에게 동물을 바치는 이교 제단과 성전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신전에서 일하는 여 사제들은 몸을 파는 일을 겸했습니다. 이런 도시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런 환락적인 삶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신앙적 특징은 열광적인 신비주의인데, 대표적인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을 그 문제에 할애합니다. 그가 거기서 말하려는 핵심을 끊어서 본다면, 방언을 자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방언과 예언(설교)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19절) 어쩔 수 없이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세우라고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27절) 물론 그는 교회에서 방언을 굳이 막지는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열광적 현상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뿐이었지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런 열광적 상태에 빠진 것은 고린도교회의 부도덕성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총체적 부도덕성에 영향을 받았듯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열광적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게 지금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이런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무조건 질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책망을 듣는 걸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책망을 듣는다고 해서 잘못을 고치지도 않습니다. 물론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서로 분열되어 있고, 열광주의에 빠져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신앙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우선 설명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우상숭배를 하거나 않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상관없이, 도덕적인지 아닌지 불문하고, 열광적이던 이성적이든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영혼의 디딤돌로 삼아야 할 신앙의 토대를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론인 1: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열 번 이상 거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이 그 모든 것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공동체인 샘터교회에 모인 우리도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교육관도 다르고, 세계관도 다르고, 심지어 정치관도 다릅니다. 취미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릅니다. 이런 걸로는 교회에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취미 동아리도 아니고 정치결사체도 아닙니다. 교양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교회 회중이 한 가지 색깔로 편중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인 사람만 모이는 교회라거나 진보적인 사람만 모이는 교회는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어야겠지요. 그게 가능해야만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나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에 집중할 때만 그게 가능합니다.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은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
아마 여러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속한 이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2절) 같은 구절에서 고린도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 속한 이들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다른 모든 교회, 그리고 오늘 온 세계의 교회와 지금 샘터교회에 속한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가 실제로 믿고 있는지, 또한 그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아무리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인 거와 같습니다. 일부러 남편과 아내를 속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래도 나름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부부들 중에서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을 담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그 말의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잘 알지 못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말을 아주 쉽게 뱉어내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거나, 예수는 주님이라는 말은 혁명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이 용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물론 유대 남자의 평범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요셉을 아버지로 하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는 유대인 한 남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그 뜻은 구세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예수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이를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믿게 될 일정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특별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말은 다시 그가 주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주(퀴리오스)는 그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에 생명여탈권을 가진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불렀다는 말은 이제 황제숭배를 거절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삶을 맡겼습니다. 네로 황제 같은 이들에 의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퀴리오스, 즉 주인이었습니다.
저는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과 실제로 사랑 안에 거하는 게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만 돌아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주식과 부동산에 영혼을 심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테니스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을지 모르겠네요. 믿음과 삶을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을 믿는 것과 세상살이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게 옳지 않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런 주장은 옳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진지한 태도로 세상살이를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회사나 학교나 가정 일을 대충 때우는 식으로 넘어간다면 아주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한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은 여전히 부차적입니다. 세상살이는 잠정적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주 빨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관심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이 아주 빨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이 세상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이런 것은 물리적으로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지구를 자식처럼 데리고 있는 태양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앞으로 45억년 남았습니다. 우주에는 이런 별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젊음과 건강을 아무리 지켜내고 싶어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모를 가꿔도 결코 지켜낼 수 없습니다. 모든 게 빨리 사라집니다. 지금은 2008년입니다. 100년 전은 1908년입니다. 그때는 조선이 일본의 압력으로 합방되기 바로 직전이겠군요. 100년이 휙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다시 100년이 흐르면 2108년이 됩니다. 그때 우리 후손들은 100년 전인 바로 지금의 우리를 뒤돌아보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1천년이 흐르고 1억년이 흐르겠지요. 그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고, 많은 사건들이 시작했다가 끝나겠지요.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포함해서 아주 빨리 사라집니다. 이런 것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7b) 주님의 재림이 바로 세상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런 세상의 완성은 로마 황제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세상은 정치 지도자와 CEO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세상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위와 같은 설교를 듣고 여러분은 겁이 납니까, 아니면 기쁩니까?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쉬울 거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런 재림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에서 우리는 종말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재림과 종말의 생명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바울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으로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말은 곧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제도나 그 어떤 세상의 일로도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는 아직 생명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완성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아니 생명 자체가 곧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생명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볼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이십니다. 다만 역사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역사적 예수님을 가리킬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지만(Homo ousios) 역사적인 차원에서 다른 위격(persona)으로 존재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낳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바로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과감하게 선포했을까요?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그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과 연관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곧 생명의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영혼은 생명의 신비와 그 완성을 향한 희망으로 불타야 합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이 시간 안에서 아주 짧은 생명을 맛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전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영적인 만족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맺었습니다. 옳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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