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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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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29. (롬 7:15-25)

신약성경 중에서 로마서처럼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도 드뭅니다. 로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다는 뜻이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사도바울의 정교한 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중심에는 율법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롬 7:15-25절에도 율법, 선, 악, 죄, 이성의 법, 죄의 법, 육체의 법 같은 용어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도대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건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호의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조금 부정적인 비쳐지는 언급도 없지 않습니다. 롬 7:1b에서 바울은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율법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율법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로마서를 받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어떤 편지이든지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살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 체제는 로마법에 의해서 지탱되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속한 여러 식민지는 로마법으로 통치되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의 법이 이 로마법의 영향을 받을 정도로 고대의 로마법은 세계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기준이었습니다. 로마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로마법의 질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은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롬 7:1a에서 “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라고 쓴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킵니다.
로마법이 로마라는 제국을 지탱해주는 절대 규범이라고 한다면 율법은 유대교를 지탱해주는 절대규범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수많은 법전들이 율법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지켜야 할 시행세칙도 많았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펼쳐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법을 가리켜 ‘토라’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의 삶에 토라, 즉 율법이 어느 정도나 심각하게 영향을 끼쳤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준수 문제로 인해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크게 충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얼마나 분명하게 지키는지 감시했습니다. 이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결과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그만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돌로 치라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율법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바울은 율법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없어선 안 될 요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롬 7:7b) 바울은 더 나아가서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롬 7:12)
율법이 왜 거룩한지 다시 안식일을 통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십계명의 네 번째 항목인 안식일 법은 일주일에 하루, 즉 지금의 토요일에 모든 노동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가 저녁에 시작한다고 해서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쉼입니다. 이 날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했습니다. 노예들도 일하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 짐승들도 일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안식일 법이 없었다면 노예들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에서 하루도 쉬지 못했겠지요. 모두가 돈벌이만 생각했겠지요. 안식일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는 피조물이며, 이집트의 바로에게서 해방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율법은 이처럼 사람과 땅을 살리는 법이었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
문제는 이런 율법을 통해서 실제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18b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19절)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하거나 더 부도덕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수 잘 믿고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만 본다면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외면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 기준은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자기 자신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기준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고상한 행동을 하지만 아무도 없는 데서는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겉으로는 남의 흉을 보지 않고 점잖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아주 쉽게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 가치관이 다른 사람, 교양이 없는 사람과는 함께 하기 싫어합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공평하게 대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공평하게 대할 때도 많습니다. 이런 걸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교양을 많이 쌓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교양은 바로 율법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의 기준만 제공해줄 뿐이지 그걸 행할 능력을 제공해주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기의 의지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알아도 옳은 걸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순히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그것의 뿌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게 죄입니다. 우리의 교양과 윤리와 의지는 잘못된 행동을 교정할 수는 있지만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죄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없는 존재론적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롬 7:18a)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서 절망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죄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육체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육체를 갖고 사는 한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전승을 보십시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그것은 일종의 율법인데, 그것만을 지키면 됐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국 선악과를 취했습니다. 아담과 이브를 미련하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나 같으면 절대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이브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신처럼 세상을 밝히 보고 그런 지혜를 얻게 된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평생 율법을 지켜온 바울은 지금 율법이 결국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그럴듯하지만 무기력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혜가 우리에게 선의 능력까지 주는 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파손할 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화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수 당시에 유대교는 율법을 절대화했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강요했습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웠고,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일반 백성들은 주눅이 들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런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2천 년 전 신약성서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타락했다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이런 외침에는 세상보다 교회가 더 선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교회에도 정치가 있습니다. 총회장이나 노회장을, 좀더 넓게는 한기총 의장을 뽑습니다. 이런 교회 정치도 세속정치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지만 이런 선거에서 수억 원의 돈을 쓰기도 합니다. 그게 대개는 헌금에서 나오는 거지요.  
율법의 강요에 의해서 벌어지는 더 심각한 현상은 죄책감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벗어나는 걸 반복해서 강요받으면 자학적인 심리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죄책감, 더 나아가 자학에 묶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새벽기도회 한번 빠지면 큰 벌을 받을 것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살얼음판을 걷듯이 합니다.
위선에 빠지건, 자책에 빠지건 양쪽 모두에게 문제는 신앙이 삶의 짐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평생 따랐던 유대교의 율법을 통해서 도달한 종착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전혀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율법과는 이혼하고 복음과 결혼했습니다. 롬 7:1-6절에서 그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바울은 율법의 속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법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듯이 율법도 역시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법이 무의미합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났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합니다. 그는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죽음 이후로 그는 이제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판단 받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완전히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롬 7: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이 조금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냐, 그의 부활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냐, 하고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길을 주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통한 길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율법을 무력화하고, 그의 부활로 생명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에게는 구원 문제에서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성취를 통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길은 단순히 유대교의 율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업적의, 자기의, 자기성취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삶은 모두 이런 율법의 길입니다. 자기를 확대하고, 자기를 확인하고, 거꾸로 자기를 확대하지 못할 때 자기를 비난합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은 극단적인 율법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겠지요. 조금 잘 되면 우쭐하고, 못되면 비관에 빠집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할 수 없다면 결국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력에 의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은총이라고 하며,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완전히 폐기된 것일까요? 우리가 아무렇게 살아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복음이냐, 율법이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율법 신앙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이미 뉴턴의 기계적 역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역학의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 뉴턴의 물리학을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지만 그쪽을 돌아갈 수는 없는 것처럼 율법적인 신앙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와 더불어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생명에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통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율법 너머의 생명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할는지 스스로 알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7: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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