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성령
고린도전서 12:1-11, 주현절후 제2주, 2013년 1월20일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신령한 것
오늘 설교를 위한 성경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 이런 문장에는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문장을 일단 존칭으로 바꿔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회중들에게 반말로 편지를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프뉴마티콘’이라는 헬라어 번역인 ‘신령한 것’도 ‘영적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신령하다는 우리말은 뭔가 평범하지 않는 능력처럼 들립니다. 심지어 산신령의 도술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die Gaben Geistes’라고, 즉 ‘영의 선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의역하면 ‘거룩한 은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프뉴마티콘은, 즉 신령한 것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모든 은사(카리스마)를 가리킵니다. 그 카리스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4절 이하에서 거론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등등입니다. 그리고 고전 12:28절 이하에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은사를 분류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신유, 봉사, 행정, 방언, 통역 등입니다. 교회의 모든 업무는 다 프뉴마티콘입니다. 설교, 교육, 봉사, 친교, 성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원칙적으로 신령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은사의 목록에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아경에서 이상한 언어를 쏟아내는 현상이나 마치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들도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부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유 현상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보면 호기심을 느낍니다. 그런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거꾸로 그런 현상을 유치하다고 매도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런 현상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현상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서 아주 길게 설명합니다. 고전 12장부터 14장까지, 무려 세 장에 걸쳐서 거론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2장은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고, 14장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사이에 사랑예찬이라 할 수 있는 고전 13장이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 문제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은사가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다른 은사는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됩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 은사도 옳은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 통역, 입신 등은 좀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특권의식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권위로 다른 은사들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교회의 리더십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큰소리를 낼 때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분열과 반목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고린도교회 회중들이 바울의 리더십을 거부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고후 10:10절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는 힘이 있으나 직접 대하면 볼품도 없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는 식으로 바울을 폄하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여러 가지 약점을 들어서 바울의 리더십을 부정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후서에서 심각하게 불거졌지만, 그 이전에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그런 기미가 보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신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열광적인 은사주의자들로 인해서 벌어지는 교회 분열과 반목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할까요? 조심하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교회법으로 해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한쪽의 힘이 다른 한쪽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라면 모를까, 고린도교회처럼 제 잘난 사람이 많은 교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설령 교권이나 숫자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해결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논리적으로 동의될 때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는 주(主)다
바울은 은사의 형식이 아니라 은사의 내용이 관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방언, 통역, 설교, 예언, 찬송, 구제 등등의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무당들의 신들림 같은 특별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런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복음을 담고 있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엑스타시(무아) 상태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내는 현상은 반드시 성령으로만이 아니라 악령에 의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은사가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악령에 의한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카리스마의 내용을 검증하고 있습니다.
3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장구조이지만 내용은 비슷합니다. 첫 문장의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와 둘째 문장의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헬라어 ‘프뉴마 데우’이고, 성령은 ‘프뉴마 하기오’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사의 정당성 여부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은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는다는 데서 증명됩니다. 성령에 의한 은사가 아니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한다거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표현이 너무 뻔한 것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저주할 자’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더럼대학교의 바레트(C.K. Barrett) 교수가 집필한 고린도전서 주석에 따르면 여기에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교도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행동, 또는 기독교인들의 배교 행위, 또는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면서 부르짖는 저주의 외침일지 모릅니다. 바레트 교수는 이것이 초기 기독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이단인 영지주의의 가현설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와 연관된 성경 본문으로 요일 4:1-3절을 제시했습니다. 바레트의 주장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못됩니다. 바울이 이 대목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가현설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관심은 은사에 대한 분별입니다. 과도한 은사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악령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은사에 치우치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은사 현상만으로는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것인지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퀴리오스’, 즉 ‘주’로 고백할 때만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은사의 현상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가서 어떤 신비로운 은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바로 서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주기도를 드리고, 성탄 찬송을 부르고, 주현절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많은 헌금과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자신이 종이라는 고백을 전제합니다. 종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순종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는 축소시키고 주인의 생각과 의도를 확대시킵니다. 종의 자유는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예수가 주님이라는 말이나 우리가 종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태도는 노예근성을 키울 뿐이기 때문에 바울 시대에는 필요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바울을 오해하는 겁니다. 바울은 불의를 보고도 무작정, 또는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오직 않을까 두려워서 무조건 침묵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의 순종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 다른 차원에서만 교회의 일치가 가능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의 존재론적 능력
그것은 성령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사를 개인의 능력이라든지 재주라든지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각양 은사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8절부터 각양 은사를 거론했습니다. 바울은 은사 문제를 11절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여러 은사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황홀한 경험을 합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고 눈물도 흘렸겠지요. 각종 은사들이 넘쳐났습니다. 다 좋습니다. 풍요로운 은사가 없으면 교회가 냉랭해집니다. 서로 받은 은사에 대해서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서로 섬겨야만 교회에 영적인 활력이 넘칩니다.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의 은사에 매몰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만 크게 보이는 겁니다. 이것은일종의 영적인 나르시시즘입니다. 결국 경쟁하게 되고, 다투고, 분열하고, 더 나가서 서로를 적대시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속된 표현으로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은사 자체가 아니라 은사의 원천인 성령에게 의존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영(프뉴마)입니다.
은사의 원천인 성령에게 의존한다는 말은 성령의 존재론적 능력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은사는 모두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원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모든 은사는 기능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예컨대 설교행위와 교회청소는 질적으로 동일한 은사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더 권위가 있다거나 청소하는 사람은 권위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게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일까요? 아닙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공연한 일로 교회의 일치를 훼손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 은사론이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일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직업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입니다. 성직과 세속직이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습니다. 목사나 신학자나 기업 총수나 말단 직원이나 아파트 경비원이나 모두 소명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모든 직업이 거룩합니다. 성령의 일입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이 사회 구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예컨대 의사와 간호사의 연봉을 완전히 똑같게 할 수는 없어도 그 차이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투쟁할 일이 있으면 투쟁해야 합니다. 양보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양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바울의 은사론으로 뚫고나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사회 구조도 구조지만 우리의 의식 자체도 그걸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교회 밖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각자 구도적인 태도로 우리의 각양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일종의 영적인 의식화입니다. 이런 의식의 변화와 심화로부터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가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한 것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고전 1:23-25) 더 깊이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 버전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신령한 것(프뉴마티콘)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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