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2-16)
히브리서의 특징은 예수님을 구약적인 전통에서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히 4장14절부터 10장39절까지, 자그마치 여섯 장 이상의 분량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거의 절반에 해당됩니다. 위 본문 히 4장14절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큰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어색하긴 합니다. ‘큰’과 ‘대’가 중복됩니다. 루터는 ‘참된’ 대제사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어쨌든지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대제사장 중에서 가장 큰 대제사장, 그 어떤 대제사장과도 비교될 수 없는 대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볼 때 여러 성소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좋게, 오늘의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제사장들 중에서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학교에도 일반 선생님들이 있고 교장 선생님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각 성소의 책임 제사장들이 대제사장으로 불렸습니다. 본격적으로 대제사장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 후입니다. 민족의 위기에 처해서 내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주도했습니다. 말하자면 대제사장들은 당시에 신정체제였던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 제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승천과 은혜의 보좌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인 근거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인 예수님을 가리켜 ‘승천하신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예수님의 승천을 말하고 있으며, 사도신경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승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우선 현대인들은 승천을 당혹스럽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늘, 우주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생명을 불가능하게 할 것들만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대기권을 벗어나면 공기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생명이 죽습니다. 해발 5km만 올라가도 사람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줄어듭니다. 더 멀리 나가면 흑암물질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이 올라가셨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어떤 신자들은 승천이라는 사실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현대인들의 물리적 지식을 완전히 외면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불신앙이기에 옆으로 제쳐두고 승천을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어떤 기독교 소종파 교도들은 아직도 천동설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종교가 그 사람의 진리론적 인식을 파괴한 겁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도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폐요 독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의 말은 접어두고 요한복음의 말만이라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했습니다.(요 14:6) 길과 진리와 생명은 보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면 세상의 물리적 사실을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의 물리적 사실 앞에서 승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승천은 예수님이 생명의 궁극적인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하늘은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주 전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심층적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아직은 숨어 있지만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하늘은 지금 이런 방식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성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명백하게 실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런 생명의 깊은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확인할 수 없으니까 없는 걸까요? 우리가 지금 어머니 자궁 안에 들어있는 태아라고 생각해보세요. 태아에게는 자궁 밖의 세계가 경험되지 않을 겁니다. 자궁 안이 아니라 밖이 더 실재적인 세계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바로 그 은폐된, 종말에 드러날 궁극적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 올림을 받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분이 아니라면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을 말할 때 ‘필리오 케’, 즉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를 붙여서 설명했습니다. 성령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줄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 덕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의 보좌’가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승천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동물의 피를 뿌리거나 동물의 몸을 불에 사르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죄를 얻기 위해서 이런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후로는 이런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그야말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바로 인류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제물이 없어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루터는 이를 ‘mit Freudigkeit’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쁘게’, 또는 ‘결단코’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열정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 드린 참된 제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런 의심은 이해가 갑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어리석음과 거리낌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 처형에서 구원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삼척동자도 코웃음을 칠 일이었습니다.
이런 의심, 이런 반론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가리키는 인류 구원의 유일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 기독교인들 중에서 비교적으로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역사 참여적인 신앙을 추구합니다. 휴머니즘이 그들 신앙의 특징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한국의 기독교가 세상에서 체면 유지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아무리 개혁적이고 휴머니즘적이라고 하더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우리도 각자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자고 역설합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결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없습니다.
긍휼과 은혜
어떤 분들은 위의 설명이 너무 교리적인데 치우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승천, 하나님의 아들, 은혜의 보좌 같은 용어들이 별로 삶의 중심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용어들은 고대 성서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생각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해서 생긴 겁니다. 또는 삶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해서 생긴 겁니다. 성서 용어만큼 우리 삶에 현실적인 것을 저는 못 봤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할 이유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본문 16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간다고 말합니다. 만약 긍휼과 은혜가 필요 없다면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긍휼과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긍휼과 은혜가 여기서 핵심입니다. 아무리 예배와 각종 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으며, 경건한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긍휼과 은혜의 깊이를 모른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율법의 차원에 머물고 맙니다. 지금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오나요? 아니면 그게 없어도 사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더 근본적으로, 긍휼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런 세계로 들어가고 있을까요? 음악가가 음악의 실질을 경험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긍휼은 자비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곧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도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현대인들은 자기가 모두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돈 잘 벌고, 인생 계획을 잘 짜서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삽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활동도 하고, 이웃을 돕기도 합니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굳이 하나님께 긍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의 긍휼은 뭔가 삶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도 틀린 게 아닙니다. 신자들 중에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비겁하게 살면서 자기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기 신세를 바꿔달라는 욕망이며,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인 불안감, 또는 죄책감입니다. 이런 신앙 습관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그것이 마치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 얼마나 심각하게 오도되고 있는지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 겁니다. 이 양쪽 모두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아닙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긍휼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영적인 빈곤함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구하는 영성의 가장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빈곤함이라는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했을까요?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돈만 있으면 어느 정도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건 옳습니다. 그러나 생존하는 것으로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피상적으로는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활조건을 늘리면 어딘가 마음이 넉넉해질 겁니다. 여가를 즐기고 노후 준비를 해놓으면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건 분명합니다. 선진국이 된다는 건 바로 이런 조건을 만들어간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성취하려고 우리 모두가 운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즉 생명의 깊이에서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생명의 깊이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고는 단 5분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밖의 것으로 계속 채워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얼마나 가난합니까?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의 “김혜란의 그림일기”라는 자리에 고정적으로 그림과 글을 올리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10월23일에 “나는 오직 가난하고 슬프오니...”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을 읽고 하루 종일 그 그림 곁을 떠나지 못한 헨리 나우엔의 같은 이름의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김혜란 씨는 거기서 시편 69편29절을 인용하면서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벌거벗은 내 영혼은 오직 가난하고 슬플 뿐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진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본문 히 4:13절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속도가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내려오기 힘든 것처럼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 건 아닐까요?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참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는 승천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참된 생명이 약속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갑시다. (20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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