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생명
롬 5:12-19, 사순절 첫째 주일, 2020년 3월1일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2-19).
아담과 예수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인 롬 5:12-19에서 아담과 예수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복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써 후손들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물론 죽음입니다. 반면에 예수의 의로운 행위로 인류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롬 5:18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어지는 롬 5:19절은 같은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18절의 범죄가 19절에는 불순종으로, 18절의 의로운 행위가 19절에는 순종으로 나옵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8절과 19절에 따르면 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아서 죄를 범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앞에 나온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첫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의 조상을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이브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신 겁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의 열매를 결국 따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창 3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겁니다.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롬 5:12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형식은 물론 신화적이지만 그 이야기의 메시지는 매우 심층적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질문을 따라다닙니다. 하나는 “인간은 왜 죽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왜 악을 행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현대 문명은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의 문명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평균 수명도 늘었고, 복지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죽고, 인간의 역사에는 악과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이야기는 이런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합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이 죄입니다. 사람이 아주 작은 밀폐된 방에 갇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언젠가 방에 산소가 사라지면 사람은 죽습니다. 생명으로부터 단절되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왜 악을 행하고 죄를 짓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즉 자기를 끝없이 높이려고 한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인간은 이런 욕망에 빠져서 삽니다. 그래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겉으로 살아있다고 해서 그게 실제로 살아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관념적으로 들린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을 위축시키거나 파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일상에 근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짜증이 나거나 불안해지거나 속상해지는 경우 말입니다. 각각의 상황이 다 다르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대개는 자기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핵심 원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우리가 가난과 장애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유목민들이나 시베리아 주민들처럼 전체적으로 가난한 사회에서는 가난이 불행의 원인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인 죄로 인해서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울의 주장은 인간 실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와 의
바울이 말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인류의 운명에 들어왔으나 예수를 통해서 의와 생명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대표자이고 예수는 순종의 대표자입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인류는 죽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예수로 인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예수입니다. 아담은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표(롬 5:14b)로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예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바울은 ‘의’(디카이오수네)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18절과 19절에 다 나옵니다. 차례대로 따라가겠습니다.
18절(b)은 이렇습니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의 행위가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행위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당시 대다수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사건으로 보았을 겁니다. 십자가 죽음은 율법을 부정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가르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손상했다 하여,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고발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달리 예수의 행위를, 즉 예수라는 존재 자체를 의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과감한 주장입니다. 유대인들이 의의 정수라고 생각했던 그 율법 때문에 죽은 예수가 거꾸로 의의 중심으로 들어선 겁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바울의 이런 주장이 가소로웠을 겁니다.
19절(b)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의 순종이 하나님의 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도 정말 과감한 주장입니다. 유대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인정한 사건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부활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설교자의 한계이자 딜레마입니다. 바울의 이런 진술과 주장에는 부활 신앙이 깔려 있기에 부활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으나 오늘 설교는 부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니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간략하게만 짚겠습니다.
예수 부활은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어 무덤에 장사 되었던 예수를 제자들이 “살아있는 자”로 경험한 사건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생명 경험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입니다. 의와 생명은 동의어입니다. 의의 반대는 죄이고, 생명의 반대는 죽음입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죄와 죽음이 인류의 숙명이 되었다면, 예수로 인해서 의와 생명이 인류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지금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고 생명에 이른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고 생명에 이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높은 가치가 있어도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죄를 이기게, 즉 의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의(義)의 능력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라는 바울의 말이 실질적으로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절대적인 기준을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도덕 법규와 실정법과 관습 등, 인간 사회를 원만하게 작동하게 하는 규범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율법이 완벽하게 통제합니다. 평생 율법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적으로 아무리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율법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 치중하면 치중할수록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율법에 강박 됩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공부에 강박감을 느끼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런 강박적인 삶에서 생명이 풍요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 차원입니다. 뭔가를 자신이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삶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홍수에 떠내려가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수영선수라서 열심히 수영하지만, 물살이 너무 세서 고생만 하지 홍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수영을 못하지만, 구명조끼를 입었기에 별 고생하지 않고 홍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노력으로 의를 선물로 받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무엇인지 알고, 그걸 실제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인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정말 의로워진 사람으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에 이른 의인으로 살아가십니까? 그런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설명하고 증언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율법 완성을 위해서, 즉 자기 스스로 삶을 모범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다는 건 죄가 없다고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죄가 없다면 생명을 얻는다는 건 당연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도(요 11:25,26)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져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달라지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각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하나님의 의로, 즉 생명 충만함으로 보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강압적 통치는 여전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아픈 사람은 여전히 아픕니다. 사업이나 정치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라고 해서 굶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닙니다.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보았고, 그걸 믿었고,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의와 생명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즉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귀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걸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이 없는 세상』이라는 책에서 저자 토마시 할리크가 쓴 인상 깊은 문장이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그의 말을 제가 조금 풀어서 쓰겠습니다.
1953-1961년에 유엔 2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스웨덴 사람 다그 함마르셸드(1905-1961)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난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모두 땡큐! 앞으로 있게 될 일들에는 모두 예스!” 우리를 위로하는 참된 인식이란 우리가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갈 때 이미 지금 여기에서 죽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한다는 통찰이다(98쪽).
지금 여러분은 의와 생명이 충만한 느낌으로 현재를 살아가십니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다는 사실에 건성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학문이 깊지 않아도 새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넓은 집에 살지 않아도 집에서 구운 빵 냄새만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실수가 잦아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고유한 인격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합니다. 자기의 잘못이나 약점을 합리화하라는 게 아닙니다. 고칠 건 고쳐야겠지요. 현재 그대로의 인생에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생명이 공기와 태양 빛처럼 가득합니다. 우리가 그걸 놓칠 뿐입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나라 안팎이 소란스럽습니다. 비교적 잘 관리되다가 십여 일 전부터 ‘신천지’와 관련하여 갑작스럽게 확진자와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겠지요. 왜 제 때에 중국에서 오는 입국자를 막지 못 했느냐고 정부를 비난하는 개인이나 정치 집단이나 언론도 많습니다. 정당한 비판이나 문제 제기도 있으나 비난을 위한 비난도 적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빛난다는 것입니다. 방역과 치료에 매진하는 의료진들이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스크와 선물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 따뜻한 말을 나누는 이들도 있겠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여전히 봄이 오고 있고,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코로나19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는 어둠처럼 보이는 영역이 많습니다. 범죄자들과 알코올 중독자들과 노숙자들도 있습니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인 이들도 있으며, 예상하지 못한 큰 사고를 만나거나 장애 아이를 둔 부모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즉 하나님의 생명을 붙들 수 있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 순간을 찾아낼 줄 아는 게 바로 기독교 영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겁먹지 말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소리높여 찬양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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