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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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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1. (마 9:9-13)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웬만큼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가능한 대로 충돌을 피하고 원만하게 지내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이나 공자님도 전반적으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계속해서 유대의 어떤 집단들과 갈등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상과 불화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9:1-17절에는 예수님과 충돌한 세 집단이 거론됩니다. 9:1-8절에 거론된 이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이어서 9-13절에 거론된 이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4-17절에 거론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해야만 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걸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셈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신학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목회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수도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이렇게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일까요? 이 문제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두 번째의 경우를 중심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근처의 한 동네에서 길을 가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웬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로 따라오라고 한다 해서 무조건 따라나설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마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겠지요.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마태가 아니라 레위라고 보도합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니까 마태복음 기자가 그 이름을 마태로 바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마태는 지금 결혼을 했을까요? 그렇다면 그의 아내가 밥상을 준비했겠지요. 결혼 전일까요? 그렇다면 어머니나 누이들이 밥상을 차렸겠지요. 그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 돈벌이가 잘 되는 직업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일제 치하에서 세무서원과 같습니다. 수입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로마의 공무원 신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서 정성껏 밥을 대접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선생님에게 밥을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설렘이 가득했겠지요. 아이들도 상황은 잘 모르지만 귀한 손님이 자기 집에 오셨다는 것만은 느낌으로 알았을 겁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순간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마태 가족들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함께 했습니다. 또한 10절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작은 잔치와 같아 보입니다. 마태가 자기 친구들을 초대했겠지요. 그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리들은 다른 죄인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세리나 죄인 모두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세리는 앞에서 잠시 설명했듯이 그 당시에 매국노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하였고, 안식일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유대인 세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이 죄인들은 부도덕한 사람들, 극빈자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배반자들을 총칭합니다.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왜 평소에는 상종하지 않는 마태의 집에 들어왔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서 그 상황을 지켜본 것일까요? 어쨌든지 그 모양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굽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건성은 자타가 다 인정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바로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유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달리 사두개파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현실 타협적입니다. 주로 부자들이었던 그들은 로마 정권과도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반골기질이 강해서 로마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재테크에도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에세네파는 극단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정권의 통치를 완전히 부정하고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또 다른 극단주의라 할 수 있는 스카리옷파는 무력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여러 정파 중에서 유대교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그야말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오랜 동안 나라 없이 살아온 유대인들이 민족정신과 종교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제자들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에게 따지는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바리새인들은 좀 까칠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따지고 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것처럼 고대 유대인들도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문제, 즉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진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밥상머리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해서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멀리 하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마태의 집에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마태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이웃의 여러 죄인들은 자신들을 참된 친구로 대해주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자리와 그 순간이 더 없이 즐거웠을 겁니다. 반면에 그 상황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더 없이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바리새인들이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저들과 어울리는가, 하고 시비를 건 것입니다. 본인들로서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그렇게 따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셋째,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둘째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은 호세아 6:6절의 인용인데, 마태복음의 편집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 세 가지 말씀 중에서 결론은 세 번째인 “죄인을 부르러 왔다.”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왜 세리,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세리와 죄인들을 무조건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거나, 그들이 그렇게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인 이유를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나쁘냐 하는 방식으로 논란을 벌이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논란에 빠져들지 않고, 아예 그것을 뛰어넘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좀 속된 표현으로 허파가 되짚어졌을 겁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와 근거를 예수님이 해체해버렸으니까요. 그들의 목표는 의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의인이 되는 것에만 몰입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거기에 매달렸는지 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구약성서의 성문화된 토라만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는 시행세칙들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불을 지피지 않았으며, 대략 5백 미터 이상 걷지도 않았습니다. 돼지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의 삶을 유지하려고 죄인들을 멀리 했습니다.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런 의인들을 구원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의인이 아니라 이들이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종의 폭탄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당혹스럽게 들립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과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은 아닙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가능한대로 성실하게 살아보려고 나름으로 노력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 수준의 의인은 못된다하더라도 죄인은 분명히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당신들과 같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딜레마입니다.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관념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같은 흑인 영가를 은혜롭게 부르면서 감격스럽게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야만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인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실제적인 죄인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혐오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능한 한 교양이 있고,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의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이라는 의식입니다. 추상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적으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세리의 정체성이고, 후자는 바리새인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이중적 자기 인식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삶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삶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인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씀한 게 아니라 그들을 부르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세리와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만약 모두 세리와 죄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모범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썩 괜찮을 사회가 될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세리보다는 바리새인들이 개인이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그의 생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앙적 인식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 의(義), 또는 업적 의입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런 의를 얻으려고 구도자적인 태도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경건한 삶의 성과를 얻었으며, 그런 업적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마 오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모두 죽었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꽤나 잘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철저한 자기 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가 왜 문제일까요?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불평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 왜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중심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죄인은 자기를 내세울 만한 것이 업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내세울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중심으로는 자기가 이룬 업적에 매달릴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일까요? 이 세상에서 내세울 게 없는, 이 세상에서 실패한,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의인이 아닐까요?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많이 땄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오늘 우리 종교 전문가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최선은 누가 의인이고 죄인이냐 하는 독단적 판단을 접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하실는지,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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