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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행 10:44-48)


고넬료 이야기

사도행전 10장은 로마 백부장 장교인 고넬료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좀 특이합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 치하에서 활동하던 일본 헌병 장교인 셈입니다. 이방인이지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입니다. 비슷한 시간에 시몬 베드로도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에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유대인이 먹지 못할 부정한 짐승과 새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먹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환상이 끝나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짐승에 대한 환상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일행과 함께 고넬료 집에 가서 고넬료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행 10:1-43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서로 비슷한 시간에 하나님의 사자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는 게 무슨 일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들도 환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 환상에 따라서 전도도 하고, 돈 버는 사업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평소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또는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가라는 환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이런 환상을 무조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텔레파시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에서 그런 환상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글쓰기입니다. 성서도 그런 글쓰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것은 이방인 장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뿐입니다.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내려놓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우리의 호기심을 끌지만 그 중심 메시지는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서를 호기심 천국 정도로 접근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 부정한 여러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다가 고넬료와 베드로가 비슷한 시간에 환상을 보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흥미를 끌만 합니다. 이에 반해 이방인 장교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단순해보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이방인 장교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이 왜 단순한 게 아닌지를 알려면 초기 기독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원시 기독교는 유대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행 1:8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막 16: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방인 전도에 최선을 기울였다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모두 이방인 전도가 시작된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추가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는 일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전도를 별로 시급하게 생각하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방인 전도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중심을 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원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그들에게 매우 귀찮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걸 무조건 거부하기도 어려웠을 테니까요. 또 하나의 문제는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복음의 내용이 마뜩찮았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지만 이방-기독교인들은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기독교를 대표하는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의 잘못된 선교 정책을 크게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기독교의 주장은 복음의 변질이었습니다.(갈 1:7)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절대성을 토라와 할례라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기득권으로 상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유대-기독교인들과 이방-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장벽으로 인해서 이방인 전도가 전체 기독교에서 부정되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방인 전도가 결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사실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대(大) 전환점이었습니다. 당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사실을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

누가는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이 무엇인지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가의 대답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행 10:44-48절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해명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끝나자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합니다.(행 10:44) 베드로와 함께 온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그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성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누가는 방언과 하나님 높임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방언은 몰아지경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을 행했다고 합니다.(행 19:6) 고린도교회 처럼 열광적인 기질이 강한 공동체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는 성서가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듯이, 또는 고함치듯이 외치는 그 현상 자체를 성령 체험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것을 굳이 흉내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성서의 핵심은 성령의 임재, 또는 성령 체험이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 자체는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성령 체험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5:22,23)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더구나 목록은 사랑만 제외한다면 기독교의 독점적인 게 아니라 당시 로마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모두 사람과의 관계와 개인 삶의 내면적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삶의 능력들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바로 진리의 영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깊이와 신비와 만나는 것이 곧 성령 경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렸다는 증거입니다. 성령 체험을 방언이나 입신 같이 오순절적 계통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은사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그건 성령을 크게 오해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식구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걸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놀랄만합니다. 고넬료가 누굽니까?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로마 제국의 장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다니, 베드로와 그 일행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오.”(행 10:47)

이방인들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는 베드로의 이 고백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모두의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성령이 임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3:2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넬료나 베드로나 다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의 특권이 무의미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깼습니다. 이런 결단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결단이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 선교가 처음부터 명확하게 주어진, 구체적인 사명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문제를 제자들에게 일일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앞으로 교회를 세워서 예수님 당신의 사명을 이어가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든 삶을 책임질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소박하게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면서 유대교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제자들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 전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결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선봉장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전도를 소극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그래서 태클을 걸어오는 유대-기독교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오해도 받고 왕따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의 여러 거점 도시에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여러 이방인 기독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피력하기도 했는데, 그 꿈이 이뤄졌는지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바울의 이방인 전도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게 왜 타당한지에 대한 선교 보고서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역사적 결단

지금까지의 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처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교활동을 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소극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오늘 극동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겠지요.

그러나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 말씀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교개념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본 선교는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잘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도 무조건 그대로 반복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와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초기 기독교의 문제는 그들이 책임을 져야했다면,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복음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전달 방식이 달라진다는, 그 대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선교 개념은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 두는 게 좋습니다.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기독교신자들을 개종시키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들이 스스로 개종한다면 그건 기쁜 일이구요.

이방인 전도를 오늘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이방인들이 누굴까요? 노숙자들인가요? 그들과 우리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동성애자들, 양심적인 병역 거부자들, 공산주의자, 미혼모, 가난한 사람들인가요? 그들과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인일 수 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들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모욕을 줍니다. 예수님을 적대했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무시합니다.       

여러분, 초기 기독교는 이방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에게 임하는 성령을, 그 구원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독교 전통과 역사의 후예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 사실이 여러분의 영혼을 요동치게 할 겁니다. 이런 뜨거운 영혼으로 오늘 한국 땅의 이방인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시다. 아멘!(2009.5.17)

사도행전 10: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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