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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사 6:1-8)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는 당혹스러워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하나님 경험이 별로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더 친숙합니다. 믿음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경험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사과가 있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사과가 맛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사과를 먹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사과를 경험한 게 아닙니다. 여기 작곡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음악의 존재론적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음악을 경험한 게 아닙니다. 여기 시인이 있다고 합시다. 시를 아무리 많이 쓴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시를 경험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지만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백 독 아니라 천 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평생 기도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험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경험은 누가 누구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구단 외우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꽃밭 가꾸기나 회사운영과도 다릅니다. 그것은 차라리 길이 없는 숲속을 걷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의 고정된 길이 아니라 각자에게 서로 다른 길이 놓여 있습니다. 어머니 가슴에 안겨 젖을 빠는 유아들의 어머니 경험과 세상이 무엇인지 알 만큼 큰 청년의 어머니 경험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 경험은 각양각색으로 주어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셨나요? 그런 경험 뒤에 어떤 삶의 변화가 따라오던가요? 여러분의 그런 경험이 진짜인가요, 가짜인가요? 우리는 오늘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우리의 하나님 경험이 옳은 것인지 되돌아 볼 수 있을 겁니다.


거룩하다

이사야는 남유다의 왕 웃시야가 죽던 해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이런 부름을 신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을 그들에게 주는 사건입니다. 웃시야는 기원전 736년에 죽었습니다. 그 시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압박해올 때였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멸망당합니다.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십여 년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남유다의 예언자였습니다. 아주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사야는 특별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대략 세 가지 현상입니다. 하나는 높이 들린 보좌입니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그 보좌에 주님께서 앉으셨다고 합니다. 그 보좌는 성전의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스랍들입니다. 스랍들의 형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날개가 여섯입니다. 두 날개로는 날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스랍들의 찬양 소리로 인해서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고, 성전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자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번제를 드릴 제단을 차렸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이 암소와 염소 등을 갈라놓은 번제물 사이를 지나갔습니다.(창 15장) 야곱은 벧엘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28:12)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불꽃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경험했습니다.(출 3:2)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횡단하면서 지진과 화산폭발 같은 자연현상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제 각각 서로 다른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불꽃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천둥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회오리바람이나 속삭임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구름이나 연기나 안개로, 또는 날개 달린 천사의 모습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이사야는 그 하나님의 현존이 무엇인지를 스랍들의 찬송으로 설명합니다. 스랍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거룩’의 최상급 표현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로 거룩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경험은 곧 거룩성에 대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루돌프 오토는 이걸 가리켜 ‘누미노제’(거룩한 두려움)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거룩이라는 말이 막연하게 들릴 겁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어도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는 겁니다. 일상의 경험으로 말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서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하면 그가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어떤 평화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발산하는 이들을 가리켜 성자라고 합니다. 성자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지 않는 거룩한 ‘아우라’(후광)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무언가 거룩한 느낌이 감돕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보세요. 성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최고의 거룩한 존재를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화염으로, 사랑으로, 생명으로 감싸는 거룩한 존재를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스랍들처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근거는 그만이 창조주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스스로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가는 인간이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최선은 거룩한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것을 주변으로 반사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라 거울에 불과합니다. 이와 달리 빛 자체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분만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거룩하게 경험한다는 말은 곧 창조주의 빛에 휩싸인다는 말입니다.


영광 

그래서 본문에서 스랍들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고 노랬습니다.(사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말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말은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온 땅’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 온 땅에서 그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온 땅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저절로 생긴 게 아닙니다. 그것을 창조한 분이 있습니다. 온 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창조한 분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하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연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할 수 있습니다. 미시의 세계로부터 거시의 세계까지 온 땅은 참으로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파리나 모기가 일초에 날갯짓을 몇 번이나 하는지 알면 놀랄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맺힌 아침 이슬방울의 그 찬란한 모습이라니, 말문이 막힐 정도입니다. 이런 자연의 신비로움을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단순히 자연의 신비를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노래는 자연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들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의 온 땅은 단순히 자연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현실 전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삶과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 전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영광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눈에 보일까요? 아닙니다. 그 영광은 온 땅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온 땅에 숨어 있는 생명의 궁극적인 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은폐의 방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성서가 묘사하는 하나님 경험이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이유나, 오늘 본문의 이사야처럼 하나님 경험을 간접적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 경험과도 비슷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인도 시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종말에 이르러서야 그 온전한 실체가 드러나게 될, 그러나 여전히 은폐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해명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한 입술

이사야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높은 보좌와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과 찬양하는 스랍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분명합니다. 못 볼 걸 본 사람의 심정입니다. 자칫하면 천기누설입니다. 자신이 완전히 벌거벗겨지는 경험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a) 거룩한 분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는 죄에 대한 각성이 심각해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b)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유다 민중 전체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말이 부정하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은 단지 말에만 한정되는 건 아닙니다. 말은 인간의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순간적으로는 교언영색으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그게 들통이 납니다. 죄를 부정한 입술이라고 표현한 이사야의 통찰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인간의 죄악이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과 사회 전체의 죄악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는 이 시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되고 더 심해져도 그런가보다 합니다. 6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남북분단 체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북이 평화체제로 전환되어 국방비의 20%만 줄일 수 있다면 결식아동과 결식노인들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를 괴롭히는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습니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광에 집중하는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만을 구가하는 바알숭배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뻔뻔하게 삽니다. 왜 이렇게 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일치한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를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경험해야 합니다. 앎이 아니라 삶의 차원입니다. 단순히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크게 깨우치는 것, 즉 돈오입니다. 그게 바로 메타노이아, 회심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설교를 듣고 낙심할 분들이 있을까 해서 염려되는군요. 이러다가 구원 못 받는 거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사야, 아브라함, 모세, 바울 같은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전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분을 빗겨가지 않습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책임은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세례를 반복하면서 주님이 행하실 종말론적 구원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그 하나님의 구원을 훨씬 생생하게 누리면서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 현존에 대한 경험은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현존을 앞서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경험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사야의 경험을 전해들은 것도 이런 일입니다. 이런 신앙생활과 신앙훈련을 건강하게 이어간다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현존이 여러분의 존재 전체를 감싸 안는 걸 경험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도 2천7백 년 전의 이사야처럼 이렇게 외칠 겁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2009.6.7.)

이사야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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