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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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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6. 빌레몬 8-20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인 빌레몬서에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편지를 쓰는 바울, 편지를 받는 빌레몬,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에서 추천하는 오네시모입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아주 특이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 뒤로 그는 골로새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기독교인들의 정기 집회를 가질 정도니까 그가 얼마나 핵심적인 인물이었는지 알만 합니다. 바울은 7절에서 빌레몬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나는 친애하는 그대가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큰 기쁨과 위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일꾼을 세웠습니다. 자기가 떠나더라도 그 일꾼들이 바울의 일을 대신 감당할 수 있게 했습니다. 빌레몬은 그런 일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은 빌레몬이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개가 사회적으로 중간층 이하였는데, 아주 드물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빌립보의 루디아 같은 여자는 요즘 식으로 여성 CEO였겠지요. 바울도 사실은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냐 가난한 자냐 하는 차이보다는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주님의 일에 좋게 쓰임 받는 게 중요하겠지요. 빌레몬도 부자로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증거는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포함됩니다. 그 노예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바울이 거론하고 있는 오네시모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빌레몬이 왜 노예를 부리고 있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이런 사실들을 오늘의 눈으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빌레몬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기원후 53-55년경입니다. 로마가 다스릴 때입니다. 로마의 힘은 노예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로마는 노예제도가 아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면 그 나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사실 로마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집트도 역시 노예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이집트 주민의 힘만으로 건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고대사회만이 아니라 미국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에도 여전히 노예제도가 살아있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노예를 부리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2천 년 전 로마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빌레몬이 노예를 부렸다는 사실을 지금의 시각으로 무조건 부도덕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어느 날 도망쳤습니다. 그가 왜 도망쳤는지는 잘 모릅니다. 오네시모가 큰 실수를 저질러서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도망쳤는지, 아니면 주인의 학대에 못 이겨 도망쳤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노예가 도망친다는 건 목숨을 거는 행위입니다. 미국의 노예시대에서 그렇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도 노예가 도망치는 일들이 흔했습니다. 도망친 노예를 잡으러 다니는 전문적인 체포꾼들이 있었습니다. 체포된 노예들은 채찍 형으로부터 낙인 형을 거쳐, 십자가형에 이르기까지 잔인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런 장면은 이미 <엉클 톰>이나 <뿌리> 같은 영화에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죽기를 작정하고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로 왔습니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오네시모
도망친 노예들은 갈 곳이 별로 없습니다. 로마 당시에 대충 다섯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그들은 강도떼에 가담했습니다. 가장 편한 길이었겠지요. 아무에게도 신분이 드러날 일이 없으니까요. 2)하층문화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술집 삐끼나 중국집 배달부 같은 것이었겠지요. 3)외국으로 도망하기도 했습니다. 4)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좋은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5)에베소의 아르떼미스 신전 같은 곳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인 주인에게 팔려가게 해달라고 조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이런 다섯 가지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가능성들을 찾아보는 게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찾아왔다는 것은 바울에게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오네시모가 아무 생각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도망치다가 우연하게 바울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오네시모는 지난날 노예로 지낼 때 주인의 집에서 바울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겁니다. 빌레몬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뒤로 바울과 신앙적으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으며, 정기적인 집회를 자기 집에서 열 정도로 그 지역에서 성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집에 며칠간이나마 머물면서 말씀을 전한 때도 있었을 겁니다. 이때 오네시모가 바울에게서 큰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게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치기 전에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인집에서 도망치고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온 다음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1절은 이렇습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와 또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는 무언가 좋지 않은 사건이나 감정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도망치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도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던 노예가 주인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빌레몬은 노예들을 억지로 개종시키는 걸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노예들에게 일단 복음을 권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 오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추정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그 당시에 특별한 사정이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가 주인의 선생님이라 할 바울을 찾아갈 리가 없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자기를 찾아온 오네시모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빌레몬의 집에 머물 때 몇 번 안면은 있었지만 아직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지 않던 오네시모가 자기를 찾아온 것입니다. 주인의 심부름이 아니라 도망친 노예 신분으로 말입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로 오네시모는 바울의 감옥생활을 도왔습니다. 그 당시의 옥살이라는 게 옆에서 도움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지병을 앓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전도여행을 다닐 때 누가라는 주치의가 따라다녀야 할 정도로 몸이 약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을 겁니다. 노예였으니 그런 일은 원래 잘했겠지요. 바울도 만족스러웠습니다. 13절에 따르면 오네시모를 계속 곁에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낼 것을 결정합니다. 그를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게 별로 지혜로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걱정이 태산입니다. 도망친 노예는 중죄인입니다. 까딱하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빌레몬이 그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아주 사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오네시모의 편에 빌레몬에게 보낸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잘 받아달라고 말입니다.

종이 아니라 교우로
바울의 이 편지는 아주 감동적입니다. 내용도 그렇지만 글쓰기 방식도 심금을 울릴만합니다. 그는 8,9절에서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지만 간곡하게 ‘부탁’한다고 서두를 열었습니다. 그 부탁의 내용은 오네시모의 일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내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의 일로 그대에게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10절) 오네시모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비록 도망친 노예이지만 앞으로는 교우로 대하라고 간청합니다. 이 말은 간청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17절에 이렇게 다짐을 받습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주시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이며, 특별히 사랑하는 교우(16a)입니다. 그러니 그를 자기와 똑같이 대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편지를 받아든 빌레몬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의 스승께서 주신 말씀이니까 당연히 그대로 따랐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예, 그랬겠지요. 빌레몬은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더라도 배반당한 사람과 화해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입니다. 더구나 오네시모는 실제로 빌레몬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18절에 따르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행한 잘못과 빚이 상당히 심각했나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돈을 훔친 것일 수도 있고, 재산관리를 잘못해서 피해를 끼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직접 배상하겠다고 친필로 서명까지 한 걸 보면 그 잘못이 아주 분명하고 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나 배신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은 단지 습관이나 태도만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그렇게 오래간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서 구타당하면서 자란 사람은 나중에도 그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사람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기 힘듭니다. 잠재의식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잘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고부간이나 부부사이처럼 어른이 된 다음에 받은 상처도 그게 반복되면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더군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꿰뚫고 있을 바울이 왜 이런 편지를 쓴 걸까요? 용서할 수 없어도 자기 체면을 보고 용서하라는 뜻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에 관해서 신학적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와 능력을 바울은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인간화해의 길”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울 신학의 중심인 ‘칭의론’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에 관해서 아주 치밀하게 진술했습니다. 다른 편지에도 이런 진술은 많습니다. 칭의론은 인간이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이 세상에 스스로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실제로 잘못을 행한 사람만이 아니라 잘못을 행하지 않은 사람도 의롭지 않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다, 하고 주장한다면 그는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잘못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의롭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전가된(imputed)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실제로는 전혀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즉 우리의 의가 오직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에 이를 갈면서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화해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믿음을 통한 칭의가 아니라 자기 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설교를 듣고 속으로 고민이 생기는 분들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기도해도 미움이 없어지지 않을 때가 있지요? 얄미운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마음을 주고 싶어도 되지 않는 상대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모양을 낼 뿐이지요. 이건 저의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의 잠재의식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영성이 훨씬 깊어지면 이런 모든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긴 하겠지만 그게 단시일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께 우리를 맡기면서 최선으로 화해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노력마저 하지 않으면 우리는 칭의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어느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되고 말겠지요.
여러분, 인간화해의 길은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움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간 것만큼 우리는 이웃과 화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역시 오늘 우리는 정직하게 주기도문을 드리고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는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멘!
빌레몬서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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