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9:35-38
일꾼을 위한 기도
예수의 일
예수님이 3년 가까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가 벌써 2천년 전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활동은 신문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기록한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서 구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복음서와 서신에 기초해서 저자들의 생각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예수님에 관한 많은 전승이 마태에 의해서 편집된 내용입니다. 35절 말씀은 다음과 같은 4장23절 말씀과 거의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또한 36절 말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는 그 당시에 잘 알려진 속담이라고 합니다.(민수기 27:17, 에스겔 34:5, 마 10:6 참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인 37,38절은 누가복음 10:2절과 거의 똑같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에 관한 여러 전승을 마태가 필요에 따라서 이 대목에 끌어 모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원래 일어났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니라 저자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첨삭되고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서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와 역사의 변화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는 흡사 우리나라에서 옛날에는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무조건 결혼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선택하는 방식으로 결혼 풍습이 바뀐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를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이 지향하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읽어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마태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봅시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하나님 나라의 일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우선 앞서 4장23절에도 언급되었던 ‘예수님의 일’이 무엇인지 마태의 진술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소위 teaching, preaching, healing이라는 예수님의 일은 곧 하나님 나라의 일이기도 합니다.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인식하게 하며,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게 하며, 병고침은 우리의 몸을 낫게 합니다. 인식이든, 영성이든, 건강이든 이 세 가지 사건의 특징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영적인 세계의 신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는 새로운 세계를 얻은 것입니다. 불치병이나 장애가 치료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육과 병원의 치료 행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런 일들이 바로 구원에 관계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학교를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윤 창출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기업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병원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치유된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들은 이 세상에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의료행위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물론 예외도 많겠지만 많은 경우에 경제적인 효과가 의료행위의 목표처럼 가동되고 있습니다. 똑똑한 의학도들이 흉부외과나 정형외과처럼 힘들지만 크게 돈이 되지 않은 분야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성형외과처럼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면서도 돈이 되는 쪽으로 몰린다고 합니다. 환자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서 치료의 질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사회가 그렇게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럽, 특히 독일의 교육과 의료시스템에서 우리가 배울 게 많은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금과 의료비를 내기만 하면 경제적인 능력의 차이에 전혀 무관하게 누구나 거의 똑같은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과 의료만은 정부에서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과 우리의 사회적 전통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의 삶을 구원의 차원으로 끌어들이려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만은 언제나 소중합니다.
사회의 책임은 그렇다 치고, 교회가 정작 감당해야 할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물론 복음의 형식은 우리에게서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선포되고 있으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가 실행되고 성만찬이 집행됩니다. 예수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형식은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불안합니다. 복음은 단지 형식으로만 머물지 말고 그 내용이 새롭게 보충되어야만 살아있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이미 지동설이 확실한 세계관으로 확립된 상태에서 여전히 복음의 천동설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간혹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써 붙인 피켓을 들거나 어깨띠를 띤 사람들이,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확성기로 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열광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형편입니다. 과연 이런 독단적인 생각과 행동이 복음 선포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아직 이런 문제에서 결정적인 대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만인구원론이 옳다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구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형벌에, 즉 지옥의 고통에 던진다는 주장도 우리가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적으로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결국은 지옥을 비워두실 것이라고 언급했고, 판넨베르크도 “생전에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예민한 신학 논쟁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과연 교회가 복음(유앙겔리온)을 선포하는지, 아니면 청중을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보상 심리로 자극하고 있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왜 배척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형식적으로만 복음을 말하지 실제로는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으로, 장사하듯 율법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특성
우리는 위에서 예수의 일을 세 가지로 검토했습니다. 교육과 의료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일이 아니라 이 사회의 일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그런 일을 직접 할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사회가 감당해야 할 이런 일들이 구원론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지 예언자적 시각으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복음 선포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일이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회는 포괄적으로 구원론적 지평을 심화, 확대해야만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이어받기 위해서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제자선택(10:1-4)과 파견(5-15)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야말로 예수의 일을 위임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제자의 전통이 우리에게 계속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도 역시 이런 구원의 일들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일들은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조금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의 일과 우리의 일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의 일은 바로 예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예수와 똑같은 차원에서 십자가를 질 수도 없으면, 더욱이 부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도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일이 아니라 그 예수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간혹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들은 구원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을 교회에 데리고 온다거나 세례를 받게 할 수 있고,, 조금 더 나가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게 하거나 교회 조직에 깊이 들어온 사람이 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이런 일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열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아무리 큰 효과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종교적 힘은 순식간에 정치적 패권을 변질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어보십시오. 예수님은 군중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37,38절).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바로 추수할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이 말씀은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면 추수할 주인이 일꾼을 불러와야 합니다. 아직 추수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면 주인을 일꾼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이 아닌 한 아무도 거기서 추수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로 일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역사가 종결되는 종말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구체적인 인간의 활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하게 말하듯이 교회에도 그런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추수, 곧 구원 사건의 이니셔티브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사람이 일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건 말장난이지 실제로는 우리 인간이 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은 단지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모든 세속적인 인간 중심적 사상에만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기독교인들마저 자신들을 역사의 주체처럼 생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전투구가 이런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좀더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청하라는 말은 곧 기도하라는 뜻이겠지요.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태도이며, 동시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결국 기독교인의 삶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라는 말이 우리가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가 형성된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행동이 가능합니다. 이런 경우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 일꾼이 바로 내가 될 수 있는지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입시다.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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