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1-7
자유의 길, 분열의 길
뱀과 하와
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좀 기분이 나쁘겠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지구에 살고 있는 그 많은 동물 중에서 뱀을 등장시켰을까요? 만약 뱀이 훗날 역사 심판에 참여할 수 있다면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생각을 바꾸어 고대 근동의 종교 중에서는 뱀을 신처럼 받드는 종교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또는 유대인들에게 뱀에 대한 나쁜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 머무는 동안 불뱀에 물려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그들이 야훼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뱀을 그들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만, 그들에게 불뱀에 대한 나쁜 경험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고,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민 21:4-9).
오늘 본문에 뱀이 등장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본문 자체가 해명해주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1절). 제일 간교하다는 말은 일단 머리가 제일 좋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을 유혹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하는데, 뱀이 가장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뱀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서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는 큰 전제에서 볼 때 뱀도 역시 악 자체는 아니었겠지요. 좀 이상한 논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뱀은 악이 아니라 단지 머리가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좋은 머리를 어디다 쓰는가에 있습니다. 뱀의 좋은 머리에 의해서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뱀이 인류 최초의 여자인 하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1b절). 유혹은 원래 노골적인 게 아니라 매우 암시적으로 시도됩니다. 이 뱀의 진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함으로써 하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열매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은 창2: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거의 모든 것이 허락되고 한 가지만 금지된 명령을 바꾸어 모든 것이 금지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이 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교정했습니다. 모든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니라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 금지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여자가 뱀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의 대답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따 먹지 말라고만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이 사실이 매우 불만스러운 듯이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상황을 약간 비틀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부풀려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뱀이나 하와나 무언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뱀은 이제 좀더 노골적으로 하와를 유혹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5절).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뱀은 무슨 근거로 죽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을까요? 뱀의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옳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뒷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당장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을 운명에 처합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3:19).
뱀의 유혹은 죽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적극적 차원에서 진술됩니다.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맞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지긴 했지만 하나님처럼 되지는 못했습니다. 유혹은 부분적인 진리를 전체적인 것으로 위장하거나 침소봉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면 쉽게 방어할 수 있지만 매우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왜곡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에도 시나브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유혹의 악순환
죽지 않고 눈이 밝아질 뿐이라는 언질을 한 다음에 뱀은 타락 사건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이제 선택은 전적으로 하와와 아담의 몫입니다. 뱀은 타락의 동기만 제공했을 뿐이지 타락을 강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타락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좀 불만스럽겠지만 창세기의 타락 설화에서는 여자인 하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죽지도 않고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말에 설득당한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여자들이 길을 가면서 쇼윈도우에 설치된 옷을 유심히 쳐다본다는 것은 이미 그것에 마음이 빼앗겼다는 뜻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인간에게 있는 세 가지 욕망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폰 라트에 의하면 먹음직하다는 것은 야성적인 충동이고, 보기에 탐스럽다는 것은 좀더 심미적인 충동이며, 영리하게 해 줄 것 같다는 말은 가장 결정적인 유혹이라고 합니다. 요일 2:16절의 표현에 따르면 육체적 쾌락, 눈의 쾌락, 세속적인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가 받은 유혹은 인류 역사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뱀이 설명한대로(5절) ‘선과 악’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만족을 준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과 악을 ‘안다’는 말은 단지 우리의 인식이 깊어진다는 정도가 아니라 경험하다, ···과 친밀하게 되다, 또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는 말은 자기에게 결과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 안에 거주하는 것보다 스스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즉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유혹이 바로 최초의 인류가 겪은 근본적인 유혹입니다. 그런 양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지금 인류는 제2의 선악과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자연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먹음직하고, 보기에 참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하와가 이 유혹을 견디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미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뱀과의 대화는 매우 섬세하게 진행되는 반면에 뱀이 사라진 다음에 일어나는 하와의 행동은 매우 단조롭게 묘사됩니다.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유혹에는 여자의 움직임이 빠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는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습니다. 유혹당한 하와는 이제 유혹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와가 어떻게 아담을 유혹했는지 본문은 침묵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결정적인 맥락에서는 모든 인간적 감정과 심리에 대한 묘사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그 어떤 감정과 심리묘사도 개입되지 못한 것처럼 최초의 인류가 공범이 되는 이 순간에도 그런 묘사가 철저하게 거부됩니다.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었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하와가 주는 대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자신의 운명과 그 뒤로 모든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는 사건 앞에서 아담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타락의 책임을 완전히 하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음모가 여기에 있을 걸까요? 아니면 이런 사태에는 그 어떤 인간학적 해명이 불필요하다는 의미일까요? 어쨌든지 하와와 아담은 아무 말 없이 은밀하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독립선언이었습니다.
자기 분열의 길
본문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7절).
일단 뱀이 말한 대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건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초보는 바로 세계를 보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머물지 않고 그 자연을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연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가, 아니면 자연을 초월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요소와 그것을 초월하는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분석하고 처리해 나감으로써 인간이 편리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위대한 인식 능력이며, 그것으로 인해 주어진 인간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과연 인간의 인식 능력이 최고조로 발달하여 이 세상과 자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해서 행복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에게 제일 처음 드러난 사실은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도 물론 알몸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알몸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 이상한 일입니다. 똑같은 사태인데도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다는 것 말입니다. 똑같은 사태인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식이라는 것은 유기적 관계로부터 대상적 관계로 바뀌는 게 아닐까요? 유기적으로 하나로 있을 때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구별되면 다르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다가 인간의 문화에 적응하면서 그것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보면 이 문화라는 게 우리를 철저하게 대상화하는 과정인지 모르겠습니다. 문명이 덜 발달된 곳일수록 사람과 자연은 하나로 살아가지만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은 더욱 멀어진다는 이 현상을 놓고 볼 때도 이 말은 옳은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습니다. 알몸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결국 자기의 내면세계에서 심각한 분열을 맛보았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인식할 수 있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하나님처럼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자기 분열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 같은 자유와 능력을 선택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자기분열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인간 타락의 과정이며, 그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유의 영역이 끝없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요를 누리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개인의 자유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것들이 그대로 적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정하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들은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내면이 분열을 피해보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처럼 자꾸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립니다. 어딘가 우리에게 불안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옷을 사든지, 집을 사든지, 명예를 구하든지, 자식을 출세시키든지 하는 방식으로 우리 앞을 가립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자기 분열의 길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의 극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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