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대림절 첫째 주일, 2019년 12월1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1-5).
오늘 설교 본문의 저자로 알려진 이사야는 기원전 736년부터 701년까지 유대 왕국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당대 근동의 최고 권력자인 아시리아에 의해서 무너진 기원전 721년 전후입니다. 당연히 남유대도 아시리아의 군사적 압박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져서 북한이 중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우리도 당장 핵을 개발하자고, 군사력을 더 증강하자고 아우성칠 겁니다. 안보 불안증으로 겁먹고 있었을 유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국가 위기의 순간에 이사야는 무슨 설교를 했을까요?
이사야의 신탁
2절부터 4절까지 내용은 한 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 무대가 되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야무진 꿈입니다. 지금 남한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합니다. 우리야 그런 주장을 들으면 즐겁겠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시답지 않게 생각하겠지요. 이사야의 이런 메시지는 그 시점에서 볼 때 아무런 근거가 없었습니다. 실현되지도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백 이삼십 년이 흐른 뒤에 예루살렘은 새로운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이사야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뭔가 헛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설교한 것일까요? 위대한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선지자를 점쟁이 비슷한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사업이 성공할지 아닐지, 남북한이 언제 통일할지 꼭 집어서 말하는 사람은 점쟁이이지 선지자는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는 미래에 벌어질 구체적인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미래를 준비하라고 현재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백 이삼십 년이 흐른 뒤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멸되었다고 해서 이사야의 설교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때, 그리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급한 사람과 세상의 일에만 일희일비하면서 마음이 쏠려있는 사람은 이사야의 신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사야보다 2천7백 년이 지난 21세기 격동의 한반도에서 기독교 목사로 사는 사람으로서 이사야의 이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즉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때와 그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저도 이사야와 같은 관점에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 4절이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떨립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심정이실 겁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번에는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매우 인상 깊은 표현입니다. 민족 간의 분쟁과 나라 사이의 분규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전쟁으로 비화합니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몇몇 나라와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완전히 붕괴한 역사적 사건을 본 사람입니다. 이렇게 전쟁을 겪고 나면 누구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충격을 벗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 전쟁에서 패배한 작은 나라 사람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나라 사이만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도 분쟁과 분규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싸울까요? 단지 의견 충돌로 끝나지 않고 전쟁에까지 이르게 되는 걸까요? 인간은 왜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평화롭게 산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라는 게 고달픈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적’ 문제로 시시비비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우리의 가장 주된 적은 어느 나라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북한인가, 중국인가요, 일본인가요? 주적은 아예 없나요? 이런 문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일단 북한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하니 왜 남북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 시키려는 목표로 핵무기까지 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북한은 아마 남한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고 여길 겁니다. 양쪽의 생각이 이해는 됩니다. 핵무기는 정말 가공할 무기이기에 남한의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전쟁 수행 능력만으로 본다면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북한의 핵무기보다 더 강합니다. 가난하고 정권 안보가 불안한 북한 사람들의 불안은 우리보다 수십 배는 더 심하다는 뜻입니다.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에는 미군이 없는데 북한에는 중국군이 4만 명 가까이 주둔한다고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남한과 북한은 서로 불신하고 두려워하면서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두려움이 전쟁에 떨어지는 내면적인 심리입니다.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들도 상대방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면서 충돌합니다.
인간이 반복해서 충돌하는 이유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인간의 공격성이 자리합니다. 공격성으로 나타나는 데도 많은 이유가 있겠지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보면 시기심이 동생을 살해하는 동기입니다. 도덕적 우월주의도 공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주인공은 세상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으로 벌레처럼 백해무익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합니다. 마녀사냥이나 왕따 현상도 공격성의 일종입니다. 정상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내면에도 이런 심리가 크게 작게 작용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상황에 의해서 억제될 뿐입니다. 이런 공격성이 국가의 차원에서 벌어지면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계 경찰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에 모든 권한을 맡기면 될까요? 유엔이 해결할까요?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가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규와 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사람이 분규와 분쟁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리아 같은 제국은 다시 나타날 겁니다.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작은 나라가 자기 목소리를 내다가 충돌이 심해지면 전쟁이 됩니다.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에는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인 간의 불화도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사야는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대로 세상이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그 외침은 살아있습니다. 그 외침대로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칼로 보습(쟁기)을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든다는 표현은 미가 선지자의 설교에도(미 4:3) 똑같이 나옵니다. 칼을 보습으로 만드는 일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조건에서만 일어납니다. 하나는 전쟁을 벌여서 한 나라가 무조건 항복할 때입니다. 포로들은 무장해제가 원칙입니다. 그런 장면을 전쟁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100% 믿을 수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더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는 여전히 전쟁 연습에 열을 올립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스라엘도 칼과 창을 더 만들었고, 지금은 팔레스타인과 인근 이슬람 국가를 공격합니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전 세계 핵무기를 다 사용한다면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쟁 연습에서는 대한민국도 그 여느 나라 못지않게 열정적입니다. 2019년도 우리나라 국방비 예산은 대략 전체 국가 예산인 470조의 10%에 해당하는 47조였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20배 가까이 됩니다. 국방비 47조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제가 잠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습니다. 서민용 아파트 한 채를 2억 원으로 계산하면 대략 23만 채 값입니다. 극빈자에게 연 1천만 원의 생계보조비를 지원한다면 460만 명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47조 국방비는 매년 들어가는 돈입니다. 여기에 인건비가 포함되기에 단순 계산으로 문제 삼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국방비가 전체 예산에서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내년에는 주한 미군 주둔 비용을 대폭 올리라고 미국의 압박이 심합니다. 지금의 1조에서 다섯 배 인상한 5조를 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돈인지는 계산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비용이 전쟁 연습에 쓰입니다. 칼을 쟁기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외침이 정말 공허하게 들리는 시절을 우리가 삽니다. 성경을 삶의 근거와 방향으로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과도하게 군사비를 지출하는 이유는 일단 우리 눈에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북한의 위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북이 공격하지 않겠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들면 서서히 전쟁 연습을 줄여나갈 수 있겠지요. 문제는 이런 판단을 내리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이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비극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에 의해서 시작됐습니다. 그 결정에 참여한 국가 중에서 미군만 남한에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평화 관계를 만들어가기 힘든 이유는 우리의 동맹이라는 미국입니다. 참으로 이런 아이러니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남한 국민의 대부분은 미군 철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적화통일의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고 끊임없이 전쟁 연습에 열을 올리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답을 모릅니다. 다만 칼과 창을 농기구로 바꾸라는, 그런 때가 온다는 이사야의 외침을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평화 연습
제가 이사야의 외침에서 배운 내용은 비록 현실에서는 제국을 중심으로 전쟁 연습이 계속되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평화를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는 말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 지향적인 삶을 살아내라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정치 개념으로 구체화하면 군비증강이 아니라 군비축소입니다. 우리 남북한 관계를 놓고 본다면 햇볕정책입니다. 북한을 힘으로 압도하기보다는 그들이 정권 붕괴를 걱정하지 않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나올 수 있도록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정책이 햇볕정책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햇볕정책을 이용해서 북한이 결국 핵무장을 하게 된 게 아니냐고, 그런 정책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무조건 전쟁은 없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평화 정책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햇볕정책을 밀고 나가고 싶어도 그게 어려운 이유는 결국 미국의 극동 아시아 군사전략 때문입니다. 미국은 단순히 남북한에만 한정하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를 분석하기에 가능한 한 현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특히 미국의 무기 생산업체의 로비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들은 남북이 냉전을 유지해야 돈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요. 북한의 적화통일 운운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습니다. 남북의 국력 차이가 너무 커서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체제라서 남한이 적화통일될 염려는 단 1%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남한의 일부 지도자들의 적화통일 운운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이사야는 국가 간의 전쟁 연습이 없는 세상을 외쳤습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런 낭만적인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평화 질서가 반드시 온다고, 와야만 한다고 외쳤습니다. 누가 정말 바보일까요? 그런 세상은 절대 올 수 없으니 전쟁 연습에 열을 올리는 사람인가요, 그런 희망을 안고 평화 연습을 하는 사람인가요?
이사야의 외침을 우리는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개인의 삶에서 전쟁 연습이 끝나는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전쟁하듯이 삽니다. 칼과 창을 내려놓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불행하니 돈에 모든 삶을 투자합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온갖 사교육에 몰두하는 이유도 돈벌이와 직접 관련됩니다. 만약 일류 대학교에 가지 않아도 무시당하지 않고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이 보장된다면 보석 같은 젊은 시절을 고행하듯이 입시 공부에 소진하지는 않겠지요. 최소한 독일처럼 사회주의 정책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는 때를 기다리고, 그런 방향으로 정치도 바꿔야 합니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의 삶으로부터 공동의 평화로운 삶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전쟁 연습에 떨어지지 말고 평화 연습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2019년 첫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은 마 5: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평화 지향적인 삶이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전쟁 연습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이 세상에 푹 빠지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정신을 차린다면 길이 보일 겁니다. 그 길을 본 사람은 좌고우면 없이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더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실 우리의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