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3:7-9
인격으로서의 하나님
그저께 성탄 전야 모임을 저희 집에서 가졌습니다. 성탄 찬송을 부르고, 지예 양의 바이올린 연주가 있은 다음에, 바르트의 묵상집 중에서 일부를 읽었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2:11절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였고, 제목은 “성탄절의 기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때마침 배달 신청한 중국 음식이 도착해서 함께 둘러 앉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부 모인 사람이 일곱 명이니까 옛날 같으면 실제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날 모임의 메인이벤트는 ‘영화보기’였습니다. 160 여분 길이의 영화 “인도로 가는 길”을 오징어와 귤을 먹으며 끝낸 시간이 대략 밤 11시였든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드라마틱하거나 크게 감동적이지도 않은, 그야말로 인도의 풍경을 조금 엿볼 있는 잔잔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피곤한 사람들은 졸기에 알맞았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는 두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제국주의 영국과 그 나라에 지배받는 코끼리의 나라 인도였습니다. 영국은 국가 절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나라인 반면에, 인도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나라였습니다.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며, 인도는 힌두교 국가라는 점에서 양국 모두 종교적인 나라인데도 세계관은 철저하게 달랐습니다. 영국은 전쟁, 지배, 의지, 논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인도는 평화, 순종, 마음, 직관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양쪽 국가 모두 종교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반되는 세계관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신론의 차이가 가장 핵심적인 대답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하는 인격적인 신이지만, 힌두교의 하나님은 인간이 단지 숙명적으로 따라야 할 인격 너머에 있는 자연 신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힌두교 철학교수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을 아무래 피해보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성서의 하나님은 이미 계획했던 것이라도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 바꾸는 분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힌두교의 신과 크게 다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화가 자주 등장합니다. 흡사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들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속삭이는 듯한 모습들도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인격적인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구체적으로 하소연도 하고, 무엇을 구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야훼 하나님을 자신들이 인식한 그런 하나님으로 설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에집트로부터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채찍으로 내리치시기도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야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들을 돌보는 모습과 비슷한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하나님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좋은 일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글들은 일종의 노랫말이기 때문에 문학적 수사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야훼, 너무나도 친절하신 분, 그 크신 자비와 끝없는 선하심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나 어찌 잊으랴?” 흡사 우리의 노래 ‘어머님의 은혜’와 비슷한 노랫말로 들립니다.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대개 아버지 상으로 표현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9b절을 보십시오. “다만 그들을 사랑하시고 가엾게 여기시어 건져 내셨다.” 가엾게 여기시었다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의 히브리어 ‘레헴’은 원래 임신한 어머니의 자궁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다만 복수로 쓰일 때는 ‘긍휼’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나님을 자기 몸 안에 들어 있는 아기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비슷한 분으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c절에도 이런 생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그들을 쳐들어 안아 주셨다.” 야훼 하나님이 아버지 상으로 그려지든지 어머니 상으로 그려지든지, 이런 것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인 우리의 삶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극진한 사랑의 근원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절대적인 신뢰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조금 과장해서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음과 같인 여기신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백성이다. 배신을 모르는 나의 아들들이다.”(8절). 배신을 모른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배신을 밥 먹듯 한 민족이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녀와 같다고 비판한 적도 많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온 길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떳떳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유목민이었던 그들이 농경생활을 통해서 고급의 문명을 일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야훼 하나님보다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조가 없다거나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장 물질적인 풍요가 보장되는 삶과 생명의 본질을 추구해야 할 삶 중에서 우리가 선택해야만 한다면 대개는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젊은 여자에게 두 남자가 구혼을 했다고 합시다. 한 남자는 탄탄한 기업체 사장의 아들이고, 다른 남자는 시를 쓰는 남자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의 젊은 여자들은 사장의 아들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당장 안전한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지만 그들의 눈에는 가나안의 문화, 쾌적한 삶이 제공하는 유혹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으며, 그 어느 나라 사람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사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배신을 모른다”고 추켜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절대적인 사랑은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실제로는 평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평균 이하일 경우도 많았지만 철저하게 신뢰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절대적인 신뢰는 그 대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신뢰하는 주체에 속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에 속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 고등학교 때 영어 참고서에 읽었습니다. 사냥꾼이 이른 아침 사냥을 위해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메추라기 한 마리가 그 사냥꾼에게 말합니다. “제발 내 딸만은 쏘지 말아주세요.”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 새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냥꾼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딸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습니다. “이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랍니다.” 저녁이 되어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냥꾼의 허리춤에는 아침에 만났던 메추라기의 새끼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어미 메추라기는 왜 자기 새끼를 쏘았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자기는 하나도 잘못이 없다는 듯 못생긴 새끼 메추라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입니다만 사람의 인식이라는 게 단지 사실의 정확성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절대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배신을 모르는 나의 아들들”이라는 이사야의 표현은 곧 이런 절대적인 신뢰의 세계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행동, 생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들로 인정하신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부끄러움과 열등감이 많은 우리를 단지 위로하기 위해서 주시는 게 아니라 가장 확실한 진리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신을 모르는 아들들”이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그럴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할 수 있고, 평화를 위해서 투쟁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더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약한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배반을 밥 먹듯 하는지 몰라도 이런 우리 안에 절대 신뢰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그분의 도움으로 고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구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설명은 이런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제 구주가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바로 완전히 다른 한 곳에 머물기 위해서 들어 오셨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이곳은 구주가 단지 문을 두드리며 방이 있는가 하고 묻다가 밖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 아니라 일단 들어오신 곳입니다. 구주는 이미 우리 안에 은밀하게 들어오셔서 우리가 구주를 깨닫고 구주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는 걸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장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과 행동 중에서 고상하고 아름답고, 또는 정의로운 대목만을 머리에 그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부분에서만 구주를 느끼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주가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곳은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라 오히려 더럽게 보일 것입니다. 따뜻하고 다정스러운 게 아니라 섬뜩해 보입니다. 그곳은 인간적인 품위보다는 정반대로 동물의 본성이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12월25일)
절대긍정
설교 앞부분에서 기독교와 힌두교의 차이점을 신의 ‘인격성’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또는 친구처럼 대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인격적인 분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종교학자들은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 상을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인동성동형론’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기독교 비판가들은 기독교의 하나님 상을 가리켜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발현이라고 했으며, 자기 투사, 노예근성, 집단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기독교의 신앙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반생명적으로 끌어간다고 주장했습니다. 흡사 늘 아버지나 어머니를 의존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외형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 상이 우리가 위에서 본대로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절대긍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인격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사람을 유아로 만들기 위한 게 아니라 훨씬 성숙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세계를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곧 성서가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사실 관계에서는 배신도 잘하고 살인하고 증오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인간을 성서는 절대적으로 긍정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인간과 그 역사와 세계에 대해서 낙관적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이런 인간 긍정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법과 규범에 의해서 인간을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러니까 현실로서의 인간을 절대적으로 긍정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거리를 두어야 할 죄인들과도 아무런 격의 없이 지내셨으며,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혁명적인 선언을 하셨으며, 모든 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세상은 사람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모더니즘 이후로 인간이 도구적으로 다루어졌으며, 현실 사회주의가 경쟁력을 잃은 후에는 자본만 긍정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북한을 긍정하기는커녕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특권층은 서민들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나긴 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야훼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누가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런 사실을 거스르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긍정하시고, 다른 사람도 긍정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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