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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mms://wm-001.cafe24.com/dbia/070902.mp3정의로운 안식일
2007.09.02. 이사야 58:9-14

기원전 537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해입니다. 그들은 대략 50년 정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뒤에 이스라엘의 귀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나머지 민중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라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똑같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크게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땅에 머물러 있던 민중들은 물심양면에서 크게 고통을 당한 반면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귀족들은 다니엘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교적 넉넉하고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쪽에 속했든지 나라 없이 살았다는 점에서 지난 50년은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근동 지역의 패권을 새롭게 쥐게 된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칙령에 따라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1945년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파와 국외파 가리지 않고 모두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손질하는 등, 야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520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은 51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달라진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활동하던 말라기 예언자는 그 시대가 아주 무질서했다고 지적합니다.  

금식과 정의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3 이사야의 눈에도 그 당시의 사회가 그렇게 비쳤습니다. 그는 부패한 사회 문제를 단식과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바로 앞 단락인 사 58:1-8절에서 그 당시에 단식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실행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참된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식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면서 중요한 경건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그 고통을 금식에서 찾은 것이지요. 포로기가 끝난 뒤에도 그런 전통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단식, 즉 금식은 단지 끼니를 거르는 것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모든 종교적인 경건생활을 가리킵니다. 예배, 기도, 말씀읽기 등등, 이런 경건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며, 형식입니다. 이런 경건생활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신앙의 스승이 되었던 분들 중에서 이런 경건생활을 소홀하게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흡사 음악가가 평소에 음악을 듣고 연습해야만 음악적인 감수성을 놓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용필 씨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루라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음감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경건생활은 영적 감수성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문제는 이런 경건생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의 금식은 두 가지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금식하는 자신들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금식의 날에 돈벌이나 오락을 즐기면서 금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따위 금식을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금식을 반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금식하는 사람의 모양을 이렇게 빗대서 말합니다.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5b절) 이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입니다. 겉으로 슬픈 체하고, 경건한 척하는 금식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사 58:6,7절) 10절에서도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눠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금식을 가르칩니다. 경건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압제받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언급하는 이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던 이스라엘의 귀족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고국에서 고난 받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서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포로시대에나 포로귀환 이후의 시대에나 그들의 형편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날은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소외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들을 사람대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는 참된 경건생활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저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웬만큼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정의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랄 겁니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힘들이 제압되기를 바랄 겁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가 매우 무능력하다는 자조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억울하게 묶인 사람을 풀어주거나 압제받는 사람을 석방하고, 나의 먹을 걸 굶주리는 사람과 나누며 살지 못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그런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서가 말하는 정도까지 자기를 부정하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티브이나 신문에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의 기사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못 받는 사람들이나 쪽방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조금씩 힘을 모울 수는 있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그런 도움의 손길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에 넘쳐납니다. 이런 일에 무작정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외면하는 게 옳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은 한편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개인이 무능력하다는 사실 앞에서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사야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그는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도는 사람을 집에 맞아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그리고 도전적으로 선포합니다. 우리의 신앙 양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바벨론 포로 이후 새로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율법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시행규칙도 손질해야 합니다. 사회제도를 혁신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는가,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억울하게 묶여있는 사람들을 풀어내주는 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생존이 보장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지금 포로귀환 이후 지지부진한 사회개혁을 강력한 목소리로 외치는 중입니다. 정의로운 질서를 요구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오늘 억울하게 묶인 사람들은 누굽니까? 얼마 전에 인혁당 사건에 관계된 분들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선고공판에서 원고 승소판결이 내렸습니다. 각각 해당 가족에게 국가는 수십억 원의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습니다. 오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또한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줄여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세제개혁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청소년들은 입시라는 멍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멍에를 수부기 위해서 순전히 경쟁력 중심으로 작동되는 한국사회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은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더 높은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게 말은 좋지만 어떻게 실천할 수 있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돈에만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정의와 평화가 무슨 설득력이 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업만이 아니라 대학마저도 앵무새처럼 경쟁력만, 즉 돈만 외치고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러시아계 한국인으로 현재 오슬로 대학교 교수로 가 있는 박노자 선생은 <창비> 2007년 가을호에 “한국 대학사회의 슬픈 단상들”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립대학교 당국과 교수, 대학생 모두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다는 그의 지적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한 대목만 인용하겠습니다.
“2007년 5월에는 아예 대학재단들의 제2금융권(펀드 등) 투자와 대학이 보유한 부동산의 상업적 임대를 허용하는 방침이 발표되어 캠퍼스 백화점이 건설되는 상황까지 임박했다. 사립대 재단들은 그들대로 지금 돈을 쌓아두었다가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쓰려고만 할 뿐 학교에 대한 예산 지원에 매우 소극적이며, 정부는 정부대로 고등교육 예산을 크게 늘리지 않은 채 사립대단들의 ‘돈 쌓아두기’와 투자열풍에 대한 행정적 지원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교회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교회가 이런 일에 먼저 발 벗고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전체 교회의 30%가 미자립인데도 불구하고 교인이 모이는 교회는 수백억 원짜리 교회당을 짓는다거나 다른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이사야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대형교회는 우선 미 자립교회의 생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로 크게 부각된 사실이지만, 2007년 현재 한국교회는 1만 6천명 이상의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만약 해외로 나가는 이런 선교비를 절반으로 줄이기만 한다면 미자립교회 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게 다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원칙적으로만 보면 국내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우선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보다는 돈벌이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속적인 시류에 영합하는 게 아닐는지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서말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돈벌이와 안식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돈벌이보다 정의와 평화가 중요하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원칙적으로 옳지만, 그것의 실천은 현실적으로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양심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변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가 이미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좋은 제도가 필요합니다. 학생들도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게 능률이 더 오릅니다. 도서관이라는 제도가 뒷받침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율법 중의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 쉬셨다는 의미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도입된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 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이 시대에 따라서 오용되는 일이 많았고, 유명무실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런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마라.”(13a절) 포로귀환 이후의 이스라엘은, 특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돈벌이 때문에 안식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태도를 경고합니다. 그 날을 존중해서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사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을, 우리의 경우로 한다면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자 바리새인들이 불평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사야는 돈벌이에 취해서 살아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하는 중입니다. 이 메시지에서는 안식일이 아니라 돈벌이가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돈벌이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이 망하는 법은 없지만 돈벌이에 자기 영혼을 파는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이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외면하게 됩니다. 그런 사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과 사회적 지위로만 평가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이라는 최소한의 제도까지 부정하면서 돈벌이에 나섭니다. 그런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게 바로 예언자들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까지 안식일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안식일에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을 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해야겠지요. 이를 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각자 살아가는 자리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더 궁극적으로 그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정의로운 안식일을 향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봅시다.  
이사야 5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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