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사 5:1-7,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2019년 8월18일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사 5:1-7절에는 ‘포도원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한 편의 시처럼 읽어야 합니다. 이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포도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포도원을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걸 보니,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의 심정이 매우 절절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됩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포도원은 심히 기름진 산에 있습니다. 그 포도원을 자기 포도원처럼 돌봤습니다. 2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1)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2) 포도원 안에 망대를 세웠습니다. 3) 술 틀을 팠습니다. 이제 좋은 포도가 맺혀 수확할 때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형편없는 들 포도가 맺혔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포도원을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노래입니다.
이제 3절부터는 직접 포도원 주인의 노래가 나옵니다. 노래하는 주체가 달라진 겁니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자기와 포도원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지만 들 포도를 맺었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는 호소입니다. 자기 생각을 사람들에게 밝힙니다. 5,6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우선 포도원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헐겠다고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치기도 해주지 않을 것이며 흙에 북을 돋우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포도원에는 찔레와 가시가 나게 될 것입니다. 6b절 표현이 특이합니다. 구름에 명령을 내려서 포도원에 비가 내리지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농사를 작파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분노가 읽힙니다.
포도원 노래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불렸던 통속적 사랑의 노래를 이사야가 끌어들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을 전달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나서서 노래하고, 이어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한다는 구성으로 노래가 이어집니다. 이 노래의 핵심은 기름진 포도원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이 제대로 된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먹지도 못할 들 포도를 맺어서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에 관해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7절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포도원 노래의 주제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정의를 바라셨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는 오히려 불의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이런 외침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아모스 선지자의 다음과 같은 외침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그 앞 구절이 더 중요합니다. 거기서 아모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을 것이며, 화목제도 돌아보지 않고, 찬양과 비파 소리도 듣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정의에 관심이 없는 종교의식은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이 정의를 외친 이유는 정의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삶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공장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일하는 사람들인데, 정규직 직원과 비정규직 직원 사이에 차별이 크다면 정의롭지 못한 겁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67세 된 서울대학교 청소부가 창문도 없고 에어컨도 없는 휴게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총장이나 청소 노동자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귀한 인간입니다. 세상은 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차별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까요? 탈북자인 40대 여자와 6세 아들의 시신이 최근에 어느 임대 주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미 두 달 전에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그런 불행한 일들은 인간 세상에서 어쩔 수 없다거나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한번 다짐하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바라셨지만 도리어 포학이 일어나고, 공의를 바라셨지만 부르짖음이 가득하다는 이사야의 외침은 이 세상에서 공허한 메아리로 남습니다.
여러분은 현대가 옛날보다 더 정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두 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북유럽 국가들만 보면 옛날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세상이 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나라들, 가장 국력이 강하다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로 관점을 넓히면 정의로운 세상이 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어느 지역은 정의로웠을 테니까요. 현대가 옛날보다 더 정의롭거나 더 불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나라나 지역에서는 정의가 살아있고, 어떤 나라에는 정의가 죽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의롭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지금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이 정의로운 나라일까요? 선지자들이 꾸준하게 하나님의 정의를 외친 고대 예루살렘과 유다를 보더라도 정의를 실현하기는 꽤 어려운 듯이 보입니다. 인간 본성이 이렇게 작용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에 관해서 인류 현대사에서 나타난 가장 단적인 예가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이데올로기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초기 자본주의에 진입한 유럽은 가장 불평등한 세상으로 전락했습니다. 10대 초반 아이들이 매일 열 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목표로 공산주의가 시작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인간이 본성에서 정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일부 남은 공산주의 국가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를 순수하게 유지하는 북한 역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으나 여러 가지 내외부 모순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의 실현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좀 더 사실적인 이유는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가 서로 충돌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일상에서 늘 경험합니다. 여기 인도와 차도가 따로 없는 도로가 있다고 합시다. 차가 한 대 지나갑니다. 길을 걷는 사람은 운전자를 향해서 불평을 쏟습니다. 사람이 우선인데 왜 저렇게 속도를 내느냐고 말입니다. 운전자는 보행자를 향해서 불평을 쏟습니다. 차가 오면 사람이 길가로 붙어야지 중간까지 나오면 운전하기 얼마나 힘드냐 하고 말입니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이런 충돌은 더 심해집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매사가 부딪힙니다. 어떤 때는 한쪽이 악해서 부딪히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서로 나쁘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서로 부딪힙니다. 이런 현상을 여러분은 교회에서도 경험할 겁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도 이런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정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한 책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입니다. 샌델 교수는 이 책에서 정의에 관한 여러 관점과 논란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게 정의야, 하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노조와 기업주 사이에도 노동법에 대한 의견에서 차이가 큽니다. 성이나 젠더 영역에서의 정의 문제에 관한 이슬람권과 유럽권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의 문제가 이처럼 단순하지도 않고 그 어떤 역사에서도 완성된 적이 없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도 불가능할 겁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선지자들의 외침을 우리는 좀 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지 않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의식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보편 복지냐, 선택 복지냐 하는 논쟁 중입니다. 내년부터인가 65세 이상 되는 분 중에서 소득이 70% 이하 되는 분들에게 증액된 월 30만 원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여러 형태의 육아 지원책도 마련되었거나 마련되는 중입니다. 제가 독일에 잠시 유학했던 1980년대 독일에서는 일찍이 ‘킨더겔트’라고 해서, 상당액의 육아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외국인 부부 학생들에게도 지급했습니다. 독일에는 대학교 등록금 자체가 없으니까 우리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는 합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대학교 등록금을 국가가 감당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월세 30만 원에 30평 아파트를 장기로 빌려주는 세상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깁니다.
공짜 복지가 실행되면 누가 열심히 일하냐, 하고 불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시행착오가 있긴 합니다. 그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합니다. 더 좋은 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인류애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복지 제도의 체계화는 필수입니다. 지금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지 몰라도 자녀나 손자, 또는 그 후손 중에서 장애인이나 극빈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손자와 증손자들이 최소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사는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감당하는 일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궁극적으로 보면,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미 우리 가족인지 모릅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가 외친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정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나은 정의로운 세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은 앞에서 말씀드린 사회 제도의 개혁입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사람들 자체가 선하고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제도가 그렇게 살도록 받쳐줍니다. 세금을 정직하게 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제도가 자리를 잡아야 조세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런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아줘야겠지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도 역시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오기에 사람의 생각이 정의로워지는 게 우선이고 본질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정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으면 정의로워질까요? 그 책을 수백 번 읽어도 사람은 정의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의로워질 수 있다면 아마 법학대학원 교수들과 국회의원들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법은 정의를 세우는 질서이니까요. 정의에 관한 법의 규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실제로 정의로워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법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법을 이용해서 불법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잠시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본색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하면 정의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인간의 의로워짐에 관해서 매우 정확하고 강력하게 발언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더 중요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입니다. 롬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율법은 오늘의 실정법입니다. 붉은색 신호등 앞에서 차는 멈춰야 합니다. 돈을 번 사람은 거기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모두 법을 일단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율법이나 실정법은 세상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입니다. 저는 앞에서 법조인이 무조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도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법은 사람이 너무 엇나가지 않게 하려는 임시조치입니다. 오늘도 국회에서 끊임없이 법을 만들어내는데도 세상이 별로 정의로워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인간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지켜야 할 법을 만들었지만, 누구도 완전하게는 지킬 수 없으니, 거기에 매달릴수록 절망하게 됩니다. 법망을 빠져나갈 연구만 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으니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롬 3장에서 반복합니다. 로마서 전체가 이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롬 3:24절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라는 표현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므로 이미 정의로운 사람들이, 즉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의롭게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정의롭지 못합니다. 정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자세이지만, 그들 역시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말만 진보를 내세우지 실제 삶에서는 세상의 진보에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정의를 실천하려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는 자기 잘난 듯이 독선적으로 삽니다.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런 전형을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봅니다. 무슨 말인가요? 사람은 본질에서 위선적이고 모순적입니다. 성경은 그런 본질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 정의 실천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는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야망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붙든다는 소명으로 정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게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전혀 다른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 믿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정의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나 그런 일을 피하려고 핑곗거리를 찾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