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16LctUrMBCs?si=jWTJMsKpjEFKfd65
▣ 들어가는 말
- 존재의 비명을 듣는가?
프란츠 카프카는 『심판』이라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K는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재판에 이리저리 끌려다닙니다.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찾아보지만, 누구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K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죄인’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체포되어 끌려나가 인적이 드문 광장 같은 곳에서 “개같이” 살해당하고 말지요.
“그의 죄는 그가 알지 못한 죄였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죄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존재론적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카프카는 현대인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공허함, 이 세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깊은 소외감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깊은 탄식이지요. 우리는 모두 곤고한 존재입니다. 모두 겉보기엔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선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가?”…
- 자유로운가?
그리스도인들 혹은 한때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죄’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라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오해되고 있는 주제를 함께 마주해 보려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죄를 흔히 윤리적 잘못, 도덕적 실패로만 여깁니다. 남을 속이고, 욕하고, 거짓말하고, 훔치고, 탐욕을 부리는 행위로서의 죄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위로 드러난 죄’에만 사로잡혀 끊임없이 자책하고, 서로를 정죄하며, 정죄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 죄의식에 사로잡힌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교회를 위선과 비난의 공동체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유로워지기보다 오히려 점점 더 죄책감의 수렁에 빠져듭니다. 죄는 곧 부끄러움이 되고, 죄책감은 구원의 기쁨보다 더 강한 굴레가 되어 사람을 묶어 놓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알지 못한 채, ‘죄의식’만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비극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란 무엇인가? 그리고 죄로부터의 해방은 무엇인가? 윤리적 비난의 언어가 아니라 성경적 존재의 깊이에서 함께 다시 보려 합니다. 죄를 바로 알 때 비로소 복음이 복음으로, 자유가 진짜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그동안 잘못 부여잡고 있었던 죄의 관념을 내려놓고, 진정한 복음의 빛 아래에서 ‘죄’와 ‘구원’을 새롭게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죄란 무엇인가?
- 존재에서의 이탈(하이데거/틸리히)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인간만이 존재가 무엇인지에 묻고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빛에서 멀어지고, 존재자들의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마치 ‘존재하는 것들’ ‘존재자들’(돈, 일, 성취, 평가)에 붙들려 존재 자체의 신비와 목적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존재의 망각, 즉 실존의 타락입니다.
틸리히는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죄를 단지 법적 범죄가 아닌 “존재로부터의 소외(alienation)”라 합니다. “죄는 … 존재로부터의 이탈이다.”(폴 틸리히, 『존재와 구원』) 인간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 자기 자신과도 분열되고, 타인과 세상과도 단절되며, 삶의 의미로부터도 멀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존재의 힘(nothingness)”입니다. 이 힘은 우리를 무의미, 죽음, 허무, 냉소, 자포자기의 감정으로 몰아넣습니다.
- 심판
앞서 언급한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시골 사람이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문지기에게 간청합니다. 그 문은 열려 있으나,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평생을 기다립니다. 죽기 직전 시력이 흐려지고 암흑 속에서 자신이 들어가려 했던 법의 문들을 꿰뚫고 영원불멸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질문을 문지기에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법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밖에는 아무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죠?” 문지기는 대답합니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어. 이젠 가서 문을 닫아야지.”
이 이야기 속에서 ‘법’은 존재의 진리,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지기는 누구일까요? 자칭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 아닐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카프카의 『심판』의 이야기에서, 법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은 언제나 그 시골 사람을 향해 열려 있었으나 평생을 문 앞에서 기다리며 문지기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구원, 진리, 존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려고만 하면, 그 누구도 그 문을 막을 수 없지요. 다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유보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외면하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간 들어가게 될 것이라 자위하며 그 문 앞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서성대고 머뭇거리고 있는 인간,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는 이처럼, 열린 문 앞에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실존의 비극입니다.
- 죄는 존재를 외면하는 것
릴케는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무언가가 되려고 애쓸 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되기보다는 자꾸만 무언가 되려 합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말이지요. 실상은 분주함, 성취욕, 비교의식 속에서 자기 존재를 감추며 사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를 “이 사망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벗은 몸을 숨기고 무화과나무 잎을 두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자신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죄의 시작입니다. 죄는 단지 도덕적 잘못이 아닙니다. 죄는 나 자신의 존재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실존의 결정입니다.
신약에서는 특히 죄를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본질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3) 즉, 죄는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인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전체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 상태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사 59:2)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 즉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존재로부터 떨어진 상태인 것이지요. 또한, 창세기 4장,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만 것 같이, 죄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강화해 타자에 대한 사랑을 파괴합니다. 존재에서 멀어진 인간이 이웃과 세계와 어떤 관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자기 자신과 관계조차 왜곡되고 일그러지게 합니다. 존재가 아닌 비존재의 자신의 모습만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 왜 인간은 존재를 잊어버리는가!
- 존재 망각
그렇다면, 왜 인간은 존재를 잊어버리는 걸까요. 왜 열린 문을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만 있는 걸까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를 망각한 채, 존재자들 속에서 분주히 살아간다.” 즉, 우리는 존재 자체(Sein)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무엇을 소유할 수 있을까?”라는 도구적/기능적 세계관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늘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경향, ‘남들이 하니까’, ‘세상이 다 그러니까’ 하며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일상성’에 빠져, 본래적 물음(존재 물음)을 붙잡지 않고 계속 외적인 것들(비본래적)에 주의를 빼앗겨,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외부에 몰입된 삶을 사는 ‘산만함’에 빠져, 본질에 닿지 못하고 표면적인 ‘새로움’만 추구하며, 깊이 묻기보다는 피상적 정보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호기심’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인간이 존재를 망각하고 ‘비본래적인 상태’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열심히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존재에 대해선 침묵합니다. 결국, 존재 그 자체를 잊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다들 사는 대로’ 사는 삶에 안주하게 되지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지?” “나는 누구지?” 하고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 비존재(nothingness)의 위협
틸리히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경계 위에 선 존재(boundary being)라고 말합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늘 비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비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틸리히, 『용기의 존재』)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은 ‘비존재’라는 말입니다. 비존재는 허무이며, 무의미이며, 절망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비존재)을 생각하면서 존재를 외면하려는 ‘죽음의 두려움’,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경험하며 ‘의미의 상실’,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를 두려워서 도피하는 ‘죄책감’,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존재를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를 바라보기보다, 존재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도피하려는 방어기제를 발달시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존재를 외면하고, 대신 소유, 성과, 관계, 자기 연출 등으로 진정한 존재, 자기를 대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철학의 시작이자,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질문을 피한 채 살아갑니다. 오히려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합니다. 존재 질문은 사라지고, 존재자는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 망각’이라 불렀고, 틸리히는 ‘존재로부터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왜 존재를 잊는가?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존재의 빛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참된 존재는 사랑과 진실과 자유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습니다.
▣ 존재의 회복
- 그리스도, 존재의 회복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로 부르십니다. 요한은 선언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단지 도덕적 모범이 아닙니다. 그는 ‘비존재’의 힘을 이긴 ‘존재’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비존재의 힘, 곧 죽음과 절망과 고립을 짊어지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그리스도는 존재의 침묵 속에서 죽었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너는 다시 존재할 수 있다.” “빛이 너에게 비친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존재가 우리를 말을 거는, 비존재를 향한 존재의 역습, 존재가 우리를 다시 부르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입니다.
- 회심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를 “자기 자신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라 했습니다. 폴 틸리히는 죄를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의 상태”라 보며,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죄는 존재에서 분리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마치 스스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은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다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를 향한 회심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외면에서 직면으로, 유보에서 몰두로, 부재에서 존재로… 우리는 존재의 빛을 향해 회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존재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 나가는 말: 존재를 향하여 나아가다!
- 죄란 존재망각이다!
죄는 단순히 ‘나쁜 짓’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존재의 잃어버림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이 되려는 시도,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인간의 고집”입니다. 인간이 존재 자체(하나님)와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지 않고, 비존재(nothingness)의 힘, 즉 무의미, 허무, 두려움에 휘둘리는 상태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존재 방식(사랑, 신뢰, 진리, 책임성)에서 벗어나 비존재의 유혹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행동을 바꾸는 것이기 전에,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둠을 등지고 빛을 향하는 것, 가면을 벗고 본래의 자기를 향하는 것, 타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죄는 단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으려는 실존적 선택이다.”(틸리히)
“존재자의 세계 속에 갇힌 인간은 존재의 빛을 잃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는다.”(하이데거)
- 존재하라, 그리고 빛을 비추라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죄는 그가 알지 못한 죄였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존재하지 않으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죄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존재해야 합니다. 사랑하며, 책임지며, 빛을 비추며 존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빛으로. 존재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기적인가! 그러나 우리는, 존재를 잃은 채 살아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살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기를 원했으며, 살아있으면서 죽은 듯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존재의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주님,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려는 습관 속에 살아왔습니다.
책임지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존재하고 싶습니다.
이제 진리와 생명을 향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존재하게 하소서.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부르소서.
아멘.
0개 댓글